보스톤서 만난 탈북 대학생 세 명과 3색 대화
<특집> 보스톤서 만난 탈북 대학생 인터뷰
보스톤코리아  2018-08-23, 20:24:34 
(보스톤 = 보스톤코리아) 장명술 기자 = 한국에서는 새터민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탈북자가 쉽게 이해된다. 유사하게 미국에서 서류미비자란 말을 사용하지만 불법체류자란 단어를 미 언론은 선호한다. 미국 이민자들은 생김새가 다르니 바로 구분된다. 탈북 학생들은 생김새도 사용하는 언어도 같으니 그저 학생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탈북 대학생들은 일반 대학생들과 다른 그 무엇이 있다는 선입견을 갖는다. 

 ‘탈북’이란 두글자를 붙이는 순간부터 그들을 달리 본다는 뜻이다. 케임브리지 소재 EDR(교육격차개혁)에서 한달간 교육을 받고 있는 ‘탈북’ 대학생들을 만났다. 처음으로 만나는 북한출신의 학생들이 남한 대학생들과 전혀 다르지 않음에 놀라고 그동안 가졌던 선입견에 허탈했다. 

이민자나 다른 민족도 아닌 같은 민족에게 선입견을 갖는 것은 비극이다. 미국이란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보니 이들의 느낌을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된 것일까.

짧은 시간에 가진 인터뷰였기에 북한과 ‘탈북’ 대학생들의 한 단면만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들을 이해하는 터 정도만 일구었다는 뜻이다. 이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탈북’이란 딱지였다. 특히 차별에 힘들어 했다. 사춘기에 온 이들은 한국인들의 차별적인 시선에 민감했고, 비교적 성년이 되어 온 이는 비교적 이 같은 차별에 당당했다. 

그럼에도 다행스럽게 이들의 자존감은 아주 높았다. 1명의 남학생과 2명의 여학생의 대화를 소개한다.

이승준 학생(30, 건축학 전공). (사진= 보스톤라이프스토리 제공)
이승준 학생(30, 건축학 전공). (사진= 보스톤라이프스토리 제공)
 나의 가치는 무궁무진- 이승준 학생(30, 건축학 전공)
▶4주동안 어떤 것을 주로 공부했나?
EDR에서 기업가 정신을 많이 공부했다. 미국역사 하버드 대학과 MIT를 보면서 어떻게 공부하는지 지켜봤다. 건축이다 보니 마케팅, 기업가 정신을 몰랐었는데 기업가 정신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다양한 유명한 교수님들이 와서 기업가정신을 강의 해주셨다. 그 중 나의 가치에 관한 강의가 가장 인상 깊었다. 내가 누군지, 나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고 앞으로 나의 비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본인의 가치는? 
나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나는 다른 사람 보다 북한에서 많은 경험을 했다. 한국에서 12년을 살면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공부했다고 볼 수 있다. 

▶18살 때 탈북했는데 북한과 한국 각각의 좋은점, 나쁜점은?
북한의 나쁜 점은 굉장히 많다. 좋은 점은 친구들과 끈끈함, 명절 때 어르신 찾아뵙고 술한잔 드리고 인사드리는 것. 한국도 80년대는 그랬다고 들었다. 
한국의 좋은 점은 많다. 항상 감사하게 생활하고 있다. 모든 게 선물 같다. 안 좋은 점은 북한 사람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이 많다.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처음에 와서 적응하기 힘들다. 이겨내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힘들어서 다른 나라로 가는 사람도 많다. 또 북한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 

▶북한 사람 5명 중 1명이 핸드폰을 갖고 있다는데….?
북한도 스마트폰을 만든다고 알고 있다. (중국) 국경 쪽에 있는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많이 쓴다. 한국에 넘어온 사람들이 전화를 자주 하기도 한다. 

▶꿈이 무엇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정말 적응을 많이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한국에 살아보니 내가 여기서 산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정말 감사했다. 내가 받았던 감사 그런 것을 되돌려 준다는 심정으로 살고 싶다. 사회적인 문제 제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가지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 

김아도라(가명 24, 국제 무역학과). (사진= 보스톤라이프스토리 제공)
김아도라(가명 24, 국제 무역학과). (사진= 보스톤라이프스토리 제공)
 기회가 많은 한국 전문인이 되겠다 - 김아도라(가명 24, 국제 무역학과)
▶영어를 잘 하던데 어떻게 공부했나?
영국문화원 학원에 5개월 영국에 6개월 다녀왔다. 

▶가장 인상에 남았던 것은 
하버드 대학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미국에 오기 전부터 하버드가 넘버 1인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미국이 이번이 처음이라 공부를 해서 왔는데 주로 공부했던 것이 하버드의 역사였다. 그리고 나머지 보스톤에 대해서는 좀 지루하다. 배울 게 많은데 너무 놀 게 없다. 쇼핑도 별로 할 게 없다. 프루덴셜도 가봤는데 한국만은 못하다. 

▶한국의 여성보다 더 한국적인 여성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탈북은 언제 했나? 
2009년 9월 15일에 집에서 나왔고 11월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생활이 8년이 넘었다. 15살부터 한국에 살았다. 그 때는 암흑의 시기였다. 

▶청소년기였는데 왜 암흑의 시기였는가?
청소년기가 아닌 사춘기였다. 오기 전날까지 학교 다니다 잘 살다 오니까 여기 적응하기 힘들었다. 내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 힘들었다. 북한은 전체주의여서 자기 색깔을 가지는 게 힘들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뭐고 내가 누구이고 내 성격, 내 꿈 등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솔직하게 정말 힘든 것은 무엇이었나?
사람들의 편견이 힘들었다. 어렸을 때 (북한)사투리를 쓸까봐 입을 안 열었다. 사투리를 쓰면 수근거리거나 심지어 비웃었다. 내가 잘못하면 북한에서 와서 이렇구나 하는 지적도 싫었다. 

▶북한과 한국의 각각 좋은점과 나쁜점은?
북한에서는 꿈을 꾸지 않았다. 공부를 잘 했지만 대학에 관심은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 오니까 기회가 너무 많다. 내가 원하는 만큼 이룰 수 있다. 기회가 많은 게 가장 좋았다. 

▶북한에서는 어려움 없이 살았던 것 같은데?
아버지가 토대(출신)가 안좋았다. 재일교포였다. 하층민 중에 하층민이다. 노동계급이 아닌 사람들은 간부도 될 수 없었다. 밀수로 돈은 많았지만 권력은 없었다. 간부들이 돈은 언제든지 뺏어가곤 했다. 

▶꿈은 무엇인가?
전문성을 갖추는 것. 내가 능력이 있어야 남을 돕는다. 금전적으로 성공하고 싶다. 내가 성향적으로 혼자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만의 통,번역 쪽을 생각하고 있다. 

▶통일인가 경제 공동체인가
통일은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지만 멀다고 생각한다. 그전에 남북 경협이 필요하다. 그러면 (고향에) 갈 수 있다. 가고 싶다. 

김연령(23 교대 2년생). (사진= 보스톤라이프스토리 제공)­
김연령(23 교대 2년생). (사진= 보스톤라이프스토리 제공)­
 아직은 북한삶이 한국보다 행복했다- 김연영(23 교대 2년생)
▶많은 사연이 있다고 들었다. 
세살때 어머니가 탈북하셔서 할머니, 아빠가 키워 주셨다. 아빠가 12살 때 돌아가셨고, 할머니도 15살 때 돌아가셨다. 그 때부터 한국에 오기 전인 2015년 까지 혼자 살았다. 한국에 온지는 2년 됐다. 

▶어머니는 만나셨나?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가 해주신 밥도 먹었지만 당연히 할머니가 해주신 밥이 더 맛있었다. 3살 때 헤어져서 엄마 얼굴도 몰랐고 정도 없었다. 20살 때 엄마 얼굴을 처음 봤다. 엄마는 나를 안고 울고불고 하는데 솔직히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어릴 때 엄마없이 살다보니 힘들 때가 많았고 친구들에게도 따돌림을 받았다. 그래서 엄마에 고까운 감정이 많았다. 처음에는 감정이 좋지 않았지만 20년 만에 만났는데 ‘혼자 안고 가자’는 마음에 싫은 소리를 안했다. 2년 되어서 정이 붙었는데 다른 친구들처럼 허물없이 엄마 이랬어 저랬어 아직 못한다. 

▶언제쯤 털어 놓을 것인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나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계신다. 사실을 털어놓으면 상처를 많이 받으실 것 같다. 그리고 엄마가 많이 아프시다. 신장이 안좋으셔서 수술도 많이 받으셨다. 

▶2년 밖에 안됐으니 북한과 한국을 가장 근접하게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까지는 한국이 좋다고 못느낀다. 경제는 북한보다 좋고 하지만 한국에 오기 전까지 장사를 해서 혼자는 충분히 먹고 살 정도로 잘 살았다. 한국에 오니 빈손에서 시작해야 하니 기가 막혔다. 학교도 못다녀 공부도 못했는데 대학은 가야해서 북한에서보다 더 힘들게 살았다. 현재 교대 2학년에 재학중이다. 교대가 경쟁률이 세다. 나름 내 삶에 만족을 하지만 북한의 삶보다 좋다고 할 수 없다. 

▶그 북한의 장마당에서 말인가?
장마당을 점령할 정도로 장사를 잘했다. 회령 시장에서 종이부터, 학용품 도매를 했고 남자 양복을 미싱으로 만들어서 팔았다. 음식장사도 해봤다. 딸 같은 애가 장사를 하니 와서 사주고 했는데 가격도 다른 집보다 싸게 팔고 하니 장사의 터전이 잡혀서 잘하고 살았다. 오기 전 해에는 집도 사고 전화도 넣고 혼자만의 공간을 마련해서 너무 행복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에 왔는데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와야 했다. 

▶한국에서 교대를 다니면 교사를 할 것인가?
어릴 때 꿈이 교사였었다. 아이들을 좋아한다. 주위에서도 교사가 맞다고 하는데 석사는 다른 쪽으로 해보고 싶다. 죽을 각오를 하고 왔는데 교사로 살기에는 내 삶이 아깝다. 

▶본인의 가치는 얼마나 되는가
돈으로 따질 수 없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모든 것이 나의 바탕이 된다. 어릴 때 원망을 많이 해서 거친 성격인데 지금은 감사하다. 같은 나이에도 북한에서 온 친구들을 보면 부모한테 의지. 나는 엄마한테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여기 와서 차별적인 시선을 느끼는가?
아니 전혀 없다. 차별을 느끼는 사람들은 북한사람인 것을 숨기려 한다. 북한에서 태어난 것은 죄도 아니다. 차별하는 사람 자체가 수준이 안된다. 학교에서 우리 과에선 북한 사람 나 1명인데 학기째 과대(표)를 하고 있다. 나름 잘 살고 있다. 대학교 들어가 북한에서 왔다. 오해하지 말고 이해해 달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나를 대단하게 생각하고 도와주려 한다. 

▶가장 인상에 남았던 것은? 
나에겐 모든 것이 새로웠다. 모든 게 인상에 남았다. 이번에 느끼는 게 많았는데 세상은 너무 넓고 나의 존재는 너무 작다. 하버드는 북한에서도 유명하다. 그런데 하버드대를 직접 가보고 하버드 생들은 무엇을 위해 공부할까 생각해 봤다. 미국은 ‘미제 승냥이, 나쁜놈’이란 교육을 받아서 한국에 왔을 때 미국인들과 거리감을 두었다. 세뇌가 돼서 너무 무서웠다. 미국에서 직접 문화를 보고 체험하니 진짜 북한이 너무 속상하고 답답하다. 미국 사람들은 머리에 뿔나고 승냥이로 알고 있는데 안타깝다. 

▶통일과 경제 공동체?
경제 공동체라도 했으면 좋겠다. 경제적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고향에도 가고 싶은데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통일이 되도 솔직히 고향에 갈 확률이 낮다. 경제공동체는 고향에 갈 확률이 없다. 북한에서 우리는 반역자다. 마음을 열어서 경제라도 소통해서 북한 사람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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