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14 |
화랑세기花郞世紀, 8세 풍월주風月主 문노文弩(5) |
보스톤코리아 2018-02-22, 20:09:28 |
문노는 당대의 제일가는 격검술을 보유하고 휘하에 500명이 넘는 무사武事를 좋아하고 협기俠氣가 넘치는 낭도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일찍이 그에 걸맞는 지위를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진지왕 재위시, 설화랑이 7세 풍월주였다, 수하의 낭도들과 함께 일문을 따로 세워 ‘호국선’이라고 하였다. 한편 미실과 사도태후가 진지왕을 폐하고 진평왕을 세울때 문노가 이끄는 화랑의 힘이 필요했던 그들은 정략적으로 늦은 나이의 문노를 8세 풍월주로 세웠다. 아마도 그는 골품이 없었기에 그때까지 ‘출세’의 길이 열리지 않았던것 같다. 당시 신라인의 골품은 모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즉 왕실과 귀족들에게 여인들을 제공하는 인통의 두 계보인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의 모계에 의해서 자식들의 골骨과 통統이 정해졌다. 문노의 어머니는 위의 두 통이 아닌 가야국의 공주였다(혹은 야국왕이 조공한 여자였다). 그래서 그는 윤궁(황종의 딸)과 결혼할 때까지 골이 없었다. 문노의 가보家譜가 나오는 화랑세기, [8세 문노文弩는 비조부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가야국 문화공주文華公主다. 혹은 문화공주는 야국왕野國王이 조공한 여자貢女라고 한다. ‘호조공기好助公記’에는 ‘북국왕녀北國王女’라고 되어 있는데, 문노는 스스로 가야가 외조라고 말했으니, 북국은 가야의 북국일 것이다. 법흥대제가 가야를 나누어 남북으로 했는데 이뇌異腦를 북국왕으로 삼고 양화공주를 처로 삼게 하고, 청명靑明을 남국왕으로 삼았다. 얼마 되지 않아 이뇌의 숙부인 찬실贊失이 이뇌를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때 호조공이 가야에 사신으로 가서 책망했다. 이보다 앞서 찬실은 야국왕의 사위가 되었는데, 문화공주는 생각하건대 틀림없이 찬실의 딸일 것이다. 처음 호조공의 첩이 되었는데, 비조부공과 더불어 몰래 통하여 공을 낳았다.] 문노의 할아버지인 ‘호조공기’에 의하면 문화공주는 가야 북국왕인 찬실의 딸로 추정 된다. 그런데 이 소국小國 가야를 남북으로 나눌 수 있었던 세력이 신라의 법흥왕대에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국제관계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리고 법흥왕이 가야의 왕으로 삼은 이뇌에게는 양화공주를 비로 삼게하였다. 양화공주는 신라의 공주이다. 그의 어머니는 선혜부인(소지왕의 정비)이었으며 아버지는 호조였다. 이 호조가 문노의 할아버지이다. 그러니까 양화는 문노의 고모였다. 그리고 이뇌와 양화공주는 태자인 월광과 마지막 왕인 도설지와 월화궁주(진흥왕의 후비)를 낳았다. 그리고 561년 도설지가 많은 야인들을 거느리고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진흥왕은 이사부에게 진압을 명했고, 15,6세의 어린 사다함은 참전을 자원했고 수하에 500여명의 낭도를 거느린 문노는 어미의 나라를 칠 수 없다면서 참전하지 않았다. 한편 조카 이뇌왕을 내쫓고 왕이 된 찬실은 야국왕의 사위였다. 그리고 문노의 어머니 문화공주는 어머니가 야국녀일 가능성이 크다. 또 하나의 설은 문화공주가 야국에서 조공한 여자라는 것이다. 야국이 왜국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당시 왜국에서 신라로 왕녀를 공녀로 바친것이며, 그 공녀를 법흥왕의 신하인 호조의 첩으로 삼게했다. 이것은 당시 신라와 왜의 국제관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면이다. 또한 당시의 사건을 당시의 사람이 기록했다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문노의 할아버지 호조는 ‘가야통’이었다. 가야와의 외교사를 잘 처리하여 자주 가야 사신으로 갔다. 문노의 아버지 비조부 역시 호조의 뒤를 이어 가야와의 외교관계를 도맡아 하였다. 많은 공을 세워 청진공주에게 장가들었다. 청진공주는 청화공주의 딸이다. 그런데 청화공주의 부모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선대왕인 지증왕이나 비처왕의 후궁 소생으로 추측해 본다. 한편 청진공주는 법흥왕의 총애를 받아 남편인 비조부가 요직에 발탁되면서 권세를 누렸다. 그 권세가 칠총신七寵臣에 못지 않았다. 칠총신은 ‘마복칠성’이다. 비조부는 박영실에게 칭신하면서 그를 섬겼다. 당시 아들이 없던 법흥왕은 왕위를 박영실에게로 이으려고 하였다. 법흥왕의 딸 지소는 삼촌인 입종과 혼인하여 삼맥종을 낳았다. 그리고 입종이 곧 병사하였다. 이에 법흥왕은 지소를 박영실과 결혼하게 하여 보위를 박영실에게로 이으려고 했지만 지소는 계부繼夫 박영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소는 왕후가 되기 보다는 태후의 길을 택했다. 입종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 김삼맥종을 왕위에 올리고 실권을 잡았다. 삼맥종은 당시 7세였다(삼국유사에는 즉위 당시 15세로 기록 되어 있다). 그가 제 24대 진흥왕이며, 540년의 일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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