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00 |
화랑세기花郞世紀, 7세 풍월주風月主 설화랑薛花郞(7) |
보스톤코리아 2017-10-23, 14:01:44 |
어린나이에 신라의 제 26대 임금으로 즉위한 진평왕은 그 후 632년 정월까지 무려 만53년간 왕위에 있었다. 하지만 신라의 남자 성골은 씨가 마르고 그의 장녀 덕만공주가 차기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선덕여왕이다. 진평왕은 조모인 사도태후와 미실의 ‘진지왕 폐위’ 거사로 579년 왕이 되었다. 그는 진흥왕이 붕어한 576년에도 임금이 될뻔하였는데, 사도와 미실은 당시 태자로 있던 금륜(진흥왕과 사도왕후의 차남) 을 옹립하면서 미실을 왕후로 맞기로 정략하였다. 하지만 진지왕은 미실을 왕후로 맞이하지 않았고, 결국 미실을 멀리하면서 다른 후궁들과 주색에 빠졌다. 그 응답은 폐위였다. 그리고 김백정이 임금(진평왕)이 되었다. 여기서 잠시 역사의 시계바늘을 반세기 후인 631년으로 앞당겨 진평왕 53년조를 본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 4)의 기록이다. “여름 5월,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반란을 꾀하였다. 임금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동시東市에서 목을 베고 아울러 9족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으나, 처와 자식을 보고 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걸어 총산까지 돌아오다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헤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바꿔 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다음은 화랑세기(17세 풍월주 염장공)의 기록이다. “(염장은) 선덕공주에게 몰래 붙어 칠숙의 난을 다스리고, 공으로 발탁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염장廉長에 대한 기록이 없다(신라 후대에 무인/군인 염장閻長의 기록은 있다). 물론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나 저자는 누가 칠숙의 난을 진압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화랑세기가 없으면 그냥 많은 의문점으로 남을 수만 있었던 실마리들을 풀 수가 있다. 칠숙이 난을 일으킬 당시 진평왕은 65세 였으며, 이듬해 정월에 사망했다. 그리고 그는 아들이 없었기에 성골로 왕위를 이으려고 덕만공주(선덕여왕)가 차기 왕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의 모반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로서는 알 수가 없다. 위의 인용문이 전부이기에 여러가지 견해들만이 있을 뿐이다. 가령, 씨족의 집단주의 이념과 왕자王者 지배의식의 갈등, 진평왕의 왕권강화 정책에 대한 귀족의 반발, 덕만공주를 후계자로 지명한데 대한 반발, 여왕을 옹립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김유신 김춘추가의 득세에 대한 반발, 사륜(금륜, 진지왕)계의 득세 등 여러 견해가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여왕의 등장과 왕권강화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로 압축된다. 먼저 염장은 누구인가?(자세한 내용은 17세 풍월주 염장공편에서 다룰 것이다) 김염장은 지도태후知道太后와 천주天主의 아들이다. 지도는 제25대 진지왕의 왕비였다. 진지왕은 폐위되고나서 3년 후에 죽었다. 그리고 지도는 진흥왕의 아들인 천주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으니 그가 염장이다. 천주의 어머니는 진흥왕의 후궁 월화궁주이다. 월화는 아버지가 가야의 이뇌왕이고 어머니는 신라의 양화공주이다. 염장은 이름과는 반대로 재물의 욕심이 과하여 많은 사취를 했다. 대단한 재력가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혼자 쓰지는 않았고 김유신과 김춘추에게 뇌물로 많이 바쳤고 또한 다른 사람들과도 나누어 썼다. 즉 김염장은 김용수(김춘추의 아버지)의 이부동복의 동생이다. 칠숙, 박칠숙은 당대의 제일가는 무사 중의 한명이었다. 문노의 무예가 신기에 달했다고 전해지고, 칠숙의 무예는 경지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즉, 문노 외에는 아무도 그의 맞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찬의 벼슬로 화백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진골의 박씨로 그가 오를 수 있는 벼슬은 거기까지였을까? 하지만 그는 경지에 오른 무예로 인하여 따르는 다수의 무리들과 함께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평왕은 늙어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며 전대미문의 미증유 사건인 ‘여왕’의 등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최상위 관등인 일등급 이벌찬보다 왕좌를 노렸을까? 그는 당시 대부분 진골귀족의 불만인 여왕의 등극에 반기를 들고 모반을 했으리라. 한편 화랑세기에 의하면 염장은 김유신이 풍월주일 때 부제로 있다가 풍월주가 되었다가, 곧 자신의 부제였던 김춘추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덕만공주를 호위하면서 칠숙과 석품의 모반사건을 진압하였다(삼국사기에는 왕이 붙잡아 처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지에 도달한 칠숙의 무예를 누르고 그의 무리들을 제압한 염장, 그의 무예 또한 문노에 버금가지 않았으리라 짐작해본다. 여기서 칠숙이 받은 형벌을 보면 칠숙의 세력과 측근을 모조리 몰살하여 차기 왕인 선덕여왕의 치세를 돕고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칠숙은 모반에 실패한 후 9족, 즉 친가와 외가 그리고 처가의 3대가 몰살을 당했다. 왕실의 정권은 김유신과 김춘추 그리고 김염장의 세력이 잡으면서 우리나라 역사의 최초로 여왕의 시대를 열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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