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76 |
화랑세기花郞世紀, 6세 풍월주風月主 세종世宗(5) |
보스톤코리아 2017-05-02, 13:25:54 |
전군殿君으로 책봉된 세종의 지위와 생부 태종 이사부의 지위를 말해주는 대목이 태종의 입으로 부터 나온다. “태후는 신성神聖하여 지아비 없이도 전군을 신화神化할 수 있습니다. 전군은 신자神子입니다. 어찌 감히 신하가 아비가 되겠습니까?” 지소태후의 지아비로 세종의 생부이지만, 지소의 아들이기에 전군에 봉해진 세종은 아버지 태종보다도 지위가 훨씬 높았다. 아울러 부자의 인연은 멀어(끊어)지고 군신의 관계만 존재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세종은 이사부가 아버지임을 알기에 앉아서 절을 받지 못하였고, 자신이 지소의 아들임과 동시에 태종의 아들임을 명심하고 있었다. 한편 진흥왕은 태후의 신성과 예덕으로 중신을 총애하여 자신의 아우를 얻었으니 사사로이는 한 가정의 경사가 아닐 수 없거니와, 세종의 효심에 감동하여 태종에게 군신관계에만 얽매이지 말고 혈육으로 맺어진 연임을 상기시키면서, 세종에게는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하였다. 마침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니 세종은 크나큰 왕의 은혜에 감복하였다. 전군殿君, 전군이란 무엇인가? 갈문왕과는 다른 지위와 성격으로 왕의 아들, 즉 왕자의 한 종류임은 분명하다. 전군은 ‘정궁의 소생이 아닌’ 즉 후궁들에게서 태어난 왕자들과, 정비(왕후)가 왕이 아닌 다른 남자와 사통私通하여 낳은 아들에게 봉했던 지위이다. 법흥왕은 정비 보도와는 아들이 없다. 그의 장자 비대전군은 후궁 옥진궁주의 소생이다. 그래서 왕은 비대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고 했지만 여러 귀족들과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201) 비대전군은 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를 전군에 봉한 예이다. 그리고 세종은 생모 지소가 남편 입종이 죽은 후 맞은 계부繼夫격인 태종의 아들로 정비가 왕이 아닌 남자와 사통한 예이다. 신국神國 신라에는 신(들)을 모셔놓은 신궁神宮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혼례나 여타 길사 등의 많은 의식을 치루었다. 전군으로 봉할 때도 신궁에서 책봉의식을 치루었음이 화랑세기에 나온다. 미실이 진흥왕의 후궁으로 있을 때 낳은 왕자가 있다. 그 아들이 수종壽宗인데 태어난지 49일 만에 전군에 봉하는 의식의 기록이다. 11세 풍월주 하종전(하종은 세종과 미실 사이에서 태어났다)에 보면 “(수종을) 전군으로 봉하는 예를 수종전군의 출생 49일째에202) 거행했다. 제帝와 더불어 미실전주, 수종전군 및 공(하종)이 함께 수레를 타고 신궁에 이르러 예를 올렸다.” 이렇게 전군 책봉의 의식이 치러진 장소가 바로 신궁이다. 그 예를 올린 대상은 아마도 하늘天神일 것으로 이루어 짐작된다. 그런데 전군을 봉함에 있어서 위에서 언급한 ‘정궁의 소생이 아닌 즉 후궁들에게서 태어난 왕자들’ 이란 정의도 정확하지는 않다. 한 예를 보면, 지증왕과 정비 연제왕후의 아들들이 원종, 입종, 진종인데, 원종은 지증왕을 이어 신라의 23대 법흥왕이 되었고, 입종은 관례에 따라 갈문왕에 봉해졌다. 하지만 삼남인 진종은 다만 전군에 봉해졌다. 후대에 와서도 제 26대 진평왕의 동생들인 김백반과 김국반 모두 갈문왕에 봉해진 것과 비교해 보면 갈문왕과 전군의 차이점을 정확하게 연구해 보는것도 학계에 주어지는 또 하나의 임무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또 다른 예는 김비형金鼻荊이다. 그는 진지왕과 도화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실존인물이지만 남아있는 사료는 거의 없다. 다만 삼국유사(권1, 기이2, 도화녀와 비형랑)에 ‘진지왕과 도화녀’의 전설같은 사랑이야기 속에서 모습을 들어낸다. 유부녀인 도화를 짝사랑한 진지왕은 그녀를 불러 상관을 원했지만 도화는 남편이 있다면서 목숨을 걸고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면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고 물으니 도화는 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진지왕은 곧 폐위되어 죽었고, 그녀의 남편도 3년 후 죽었다. 남편이 죽은지 열흘 후 죽은 진지왕이 도화의 침실을 찾아와 7일 동안 머물다 갔다. 그리고 천지의 진동과 함께 태어난 아이가 비형이다. 진평왕에 의해 비형은 궁에서 자랐고, 매일밤 귀신들과 놀곤하였다. 왕의 명으로 귀신을 부려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귀교鬼橋)도 건설하였다. 비형의 군호가 ‘비형낭군’ 인데 왕의 서자이긴 하지만 또 다른 군호로 봉해져 있다. 201) 법흥왕은 정비 보도왕후로 부터 소생이 없었다. 그래서 후궁으로 들인 옥진궁주가 낳은 비대전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지만, 딸 지소가 위화랑과 이복자매 삼엽공주 그리고 삼엽의 남편 아시공의 후원으로 적극반대하였다. 결국 부왕의 뜻을 꺾고 자신의 아들 김삼맥종을 진흥왕으로 등극시켰다. 202) 원문에는 ‘七七日’ 로 나와 있는데 이종욱은 이것을 77일로 옮겼다(화랑세기 – 소나무, 1999). 그런데 김태식은 이것을 49일로 옮겼다(화랑세기 – 김영사, 2002). 김태식은 아무래도 당시는 불교적 영향으로 불교의 49재를 연상케하기에 49일로 번역하였다고 기술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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