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혁신주의의 빛과 그림자
보스톤코리아  2015-12-14, 13:50:06 
최근 미국 여러 대학에서 번진 캠퍼스 내 인종차별 철폐 캠페인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는 이 대학을 거쳤던 이들 중에서도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인물 중 하나인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에 대한 비판적인 재평가로 이어졌다. 프린스턴의 흑인 정의연맹 (Black Justice League) 소속 학생들이 이 대학의 상징적인 인물과도 같은 윌슨이 사실은  공공연한 백인 우월주의자였고,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자였음을 지적하며, 윌슨의 이름을 딴 건물이나 프로그램 명칭을 바꿀것을 주장하고 있다. 

윌슨은 1912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고 1916년 선거에서 재선되어 1913년부터 1920년까지 미국 대통령에 재임했던 인물이다. 대통령이 되기 직전에는 약 2년간 뉴저지의 주지사를 지냈으나, 그보다 훨씬 오랜 기간인 1902년부터 1910년까지 프린스턴대학의 총장으로 재임했다. 

정치인이기 이전에 윌슨은 정치개혁을 그린 탁월한 정치학자였다. 1887년 계간 정치학회지에 윌슨이 기고한 “The Study of Administration” 이라는 논문을 비롯한 저서를 통해, 부정부패를 방지하면서도 행정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함으로써 윌슨은 행정학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얻었다. 한때는 미국 정치학회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했었다. 

윌슨이 프린스턴의 총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그는 학제를 재편하고, 새로운 전공을 설립하고, 대대적으로 후원금을 모금하고, 교수 숫자를 늘리는 등 프린스턴이 명실상부한 명문대로 승승장구할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개혁을 이끌었다. 오늘날 프린스턴은 (특히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 수업에) 강의외에 별도로 학생들의 열린 토론과 참여를 유도하고, 수업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매주 교수 혹은 대학원생이 이끄는 소그룹, 즉 프리셉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 프리셉트는 바로 윌슨이 그가 총장이던 1905년에 도입한 것이다. 

대통령으로서의 윌슨 역시 개혁의 아이콘이었다. 물론 윌슨의 1912년 대선은 공화당이 (개혁 성향의) 시오도어 루즈벨트와 (보수파가 지원하는) 윌리엄 태프트 간의 분열을 겪고, 루즈벨트가 이끄는 개혁당 (Progressive Party)이 공화당 (Republican Party)으로부터 분화된 덕에 얻은 어부지리의 승리었다. 하지만 윌슨 재임기간 동안 반독점법이 강화되었고, (대기업의 이익만을 보호하던) 관세가 완화되었고,  연방 소득세법이 통과되었고, 상원의원의 직접선거가 실시되기 시작하는 등 굵직굵직한 개혁들이 단행되었다. 세계 대전이라는 상황에 맞물려 어쩔수 없이 받아들였다고는 해도, 여성들의 참정권을 명시한 수정헌법 19조 역시 윌슨 재임기에 탄생했다. 게다가 윌슨은 1차 대전 당시 국제정치의 리더이자 “세계의 영구한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의 이미지 메이킹까지 성공했다. 

프린스턴에서의 윌슨은 그야말로 우상적인 존재였다. 단적으로 그의 이름을 본따 만든 <우드로 윌슨 공공 정책 및 국제 정치 대학원 (Woodrow Wilson School of Public Policy and International Affairs)>은 프린스턴 안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가지는 엘리트 과정이었다. 윌슨의 이름은 Wilson College라는 기숙사에도 새겨졌다. 학내 어딘가에는 윌슨의 초상화가, 그리고 또 어딘가에는 윌슨이 남긴 명언이 있다.

하지만 윌슨이 프린스턴의 흑인정의연맹 학생들이 주장한 것처럼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것도 사실이다. 가령, 1915년 상영된 장편영화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을 관람한 윌슨은 “마치 빛으로 역사를 쓴것만 같은, 고도로 사실적인 영화”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사실 이 영화는 KKK 활동을 미화하고 영웅시하며, 흑인들에 대한 극단적인 편견을 드러낸 것으로 문제가 되었던 영화였던 것. 한편 윌슨은 흑백 분리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했고, 흑인들을 공직에서 배제했다. 인종차별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최근 프린스턴의 흑인 정의연맹이 주장하는 것은, 프린스턴의 상징으로 남은 윌슨의 공적이 결코 윌슨의 인종차별주의자의 면모를 가리는 방식으로 기억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자인 윌슨의 이름으로 불리는 공공 정책 및 국제정치 대학원의 상징성을 거부하기 위해 이들은 우드로 윌슨 스쿨의 이름을 새로 지어달라는 등의 요구를 했다. 실제로 윌슨의 이름을 딴 건물이나 대학원이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될 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흥미로운 것은 개혁가, 국제정치 리더로서의 윌슨과 인종차별주의자로서의 윌슨사이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간극이다. 가령, 오늘 날 개혁적인 국제정치 리더가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한다면, 분명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20세기 초반 혁신주의자들의 상당수는 개혁을 꿈꾸었고 동시에 제국주의자들이었으며, 개혁을 추진하였고 동시에 지독한 백인 우월주의자들이었다. 두 가지 코드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을까? 당시의 혁신주의는 워낙 다양한 양상을 띄었으니 한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겠으나, 혁신주의자들은 대체로 중산층 이상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 백인들이었고, 그들이 내세우는 개혁의 방향은 중산층 앵글로 색슨 백인의 질서와 도덕이 미국의 가치가 되는 그런 미국을 향해 있었다. 우드로 윌슨의 정치 및 대학 ‘개혁’이라는 공과 ‘인종차별주의자’로서의 과는 혁신주의의 빛과 그림자였을 것이다. 다양한 개혁을 꿈꿨으나 다양성에는 인색했던.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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