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갑오경장
보스톤코리아  2011-05-16, 15:20:24 
조선이 1895년에 처음으로 양력을 사용하면서 그 연호를 건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축하하는 뜻에서 건양다경(建陽多慶)이라는 문자를 써서 집집마다 댓문에 춘첩으로 부치게 했다.

나는 전번의 ‘구정에 건양다경이 왠 말이냐’는 제목의 글에서 그와 관련된 갑오경장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고 했다. 이 글은 그것의 후편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한 마디로 갑오경장은 청일전쟁을 시점으로 해서 시작되었고 청일전쟁은 동학란을 계기로 하여 일어난 중국과 일본의 싸움이었다고 하겠다.

사실 조선의 독립과 문명개화를 목표로 한 갑오경장(1894-1895)은 조선이 그 장래 운명을 걸고 도전한 실로 중대한 민족적 사업이었다. 그런데 그 갑오경장이 뜻하는 정치적인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불행한 역사를 초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같이 중대한 민족적 대업이 왜 실패하였으며 그 원인은 대체 무엇이고 그것을 실패로 돌아가게 한 책임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이 앞서게 된다.

지금까지 갑오경장에 관한 저서와 논문이 다수 발표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1910년 즉 한일합방 이후에 간행된 저서들은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의 동기와 그 결과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간략하고 허술하기 때문에 그 진실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정사라고 해야 할 ‘고종황제의 실록’과 ‘순종황제의 실록’이 총독부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더욱 그러하다.

이 두 황제의 실록은 다시 편찬되어야 한다는 말도 없지 않았다.
사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왕실문고인 규장각 도서에 포함되지 못하여 전대의 실록과 동떨어져 일반도서와 함께 꽂혀있다.

조선의 운명을 결정하는 갑오경장은 그 시행 과정에 대한 설명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실패한 원인과 그로 인하여 나타난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확실히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그런데 1945년 이전에 일본학자들이 저술한 한국역사에 대한 저서들은 그 전거가 확실치 않을 뿐만 아니라 사건 발생의 연도 표시에 있어서도 음력과 양력을 혼용하여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고 그 저술 자체가 너무나 일본편향이어서 그 진실을 믿기가 어렵다. 역사의 연구 목적은 그때의 사실을 확실히 하려는데 있는 것이지 자기네 역사를 돋보이게 꾸미기 위해서 남의 나라의 역사를 비하하거나 왜곡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오래 전에 갑오경장에 관한 저서로 1894년과 1905년 사이에 발간된 몇 권의 책을 발견하여 제록스로 카피해 놓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들 저서의 내용을 보니 1910년 즉 한일합방 이후에 간행된 저서와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1945년 즉 해방 전에 저술된 갑오경장에 대한 저서들이 신빙성이 희박하여 그 진실을 믿기가 어렵기에 1905년 이전 즉 한일합방 이전에 저술한 자료들을 가지고 당시의 상황을 다시 정리해 보자는 것이다.

갑오경장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하여 시작되었으며 청일전쟁인 동학란을 계기로 하여 일어났던 것이다. 1894년 1월 전라도의 고부에서 동학교도 전봉준(全琫準)의 영도 하에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 민란을 동학난이라고 한다. 동학란은 삽시간에 삼남을 휩쓸고 왕도 서울까지 위협을 느끼게 하였다.

이 동학란을 정부의 군대인 경군만 가지고 진압하기가 어렵게 되자, 민씨 척족의 대표자이며 사대보수당의 영수인 민영준(閔泳駿)과 장위사(壯衞使), 한규설(韓圭卨)이 조선에 주제하는 중국의 판리공사 원세개와 결탁하여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원세개(1859-1916)는 중국 청나라의 직예총독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의 심복으로 임오군란(1882)에 조선에 와서 갑신정변(1884)시 일본세력을 물리치고 통리조선 통상교섭사의 ‘통리조선통상교섭(統理朝鮮通商交涉)’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조선의 내정에 일일이 간섭하며 민씨 사대당을 조종했다. 그런데 중국은 일본과 충돌될 것을 알면서 기어이 원병을 조선에 파견하였던 것은 조선이 자기네 독립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청나라는 일찍이 중국의 명 왕조를 정복하고 1644년 이래 중국을 통치해 온 지금의 만주족의 정복왕조이다. 그런데 그 청 왕조는 오래 전부터 조선을 속국시해 왔던 것이다.

청나라는 조선의 원군요청을 즉시 받아들여 엽지초(葉志超) 제독에게 군사 3천명을 주어 조선에 파견하였다. 엽지초 제독은 인천에 상륙하지 못하고 6월 상순, 충청도의 아산만으로 왔다.

중국은 1885년의 천진조약에 따라 자기나라가 조선의 내란을 평정하기 위해 원군을 파견한다고 1894년 2월 7일부로 일본에 통고했다.
일본은 청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보낸다는 통지를 받자 본국에 와 있던 주한 일본공사 오도리게이스게(大鳥圭介)에게 해군 육전 대를 인솔하고 조선으로 즉시 돌아가게 했다.

오도리게이스게 공사는 군함 팔중산호(八重山號)를 타고 6월 10일 인천에 도착 즉시 서울로 향했다.
그 뒤로 일본 함대가 인천에 와서 정박했다. 그리고 6월 12일에는 육군소장 오시마요시마사(大島義昌)가 제 5사단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했다.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은 1만 명에 이르렀다. 그들 일본군은 장기 주둔할 계획으로 인천에 주둔하여 그 중 일부가 서울로 향하여 수도 서울의 항구로 알려진 마포에 진을 치고 일부는 서울로 들어와 남산 아래에 본부를 설치하고 경복궁과 서울점령에 대한 전략을 세워갔던 것이다.

그들 일본군은 조선을 도와 동학란을 진압시키려 온 것인지, 아니면 서울과 인천을 점령하려고 온 것인지 처음부터 그들의 동향이 의심스러웠다. 사실 일본군은 조선의 요청에 따라 파견된 것이 아니다. 일본의 변명은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냈기 때문에 자기네도 군사를 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갑신정변(1884년)이 있은 후, 1885년 청나라와 천진에서 조선문제를 가지고 조약을 맺었다.
이 천진조약의 제3항에 “조선에서 장차 반란이나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여 어느 한 나라가 군대를 파견할 때에는 서로 연락을 취한다.”라고 규정 지었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면서 그 사실을 일본에 통지했던 것이다. 사실 이 천진조약으로 이후 조선은 청국과 일본 두 나라의 세력에서 자유스럽지가 못했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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