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 보낸 세 딸을 찾아 보스톤에 온 여인의 슬픔
보스톤코리아  2009-04-20, 16:34:43 
22년 전 가난 때문에 어린 세 딸을 미국으로 입양 보내고 3년 후 세 아이의 얼굴을 보기 위해 1990년 보스톤으로 왔지만 15년만에 딸들을 볼수 있었으나 남과 다름 없었고 그동안 유일하게 의지하던 남편마저 떠나보낸 여인이 있다. 현재 메뚜은(Methuen)에 살고 있는 임순이 씨(57세)가 그 주인공.

입양 보낼 당시 아이들 나이는 큰딸 경인 8세, 둘째 딸 현미 7세, 막내 딸 승희 4세. 22년이 지난 지금은 멜리사(Melissa), 미미(Mimi), 애슐리(Ashley)로 불리며 각각 간호사, 스튜어디스, 모델로 성장해 있지만 이름만큼이나 아이들도 달라졌다.

양 엄마의 반대로 이 아이들이 22년의 세월 동안 친엄마를 본것은 두세 번 정도이다. 양엄마의 영향력과 함께 아이들이 미국식으로 자라면서 한국 엄마의 애틋한 사랑도 헤어질 당시의 절절한 마음도 잊어버린 것일까.

“아이들만 잘되면 된다. 입양을 결정할 때도 애들 생각해서 한 건데 아무려면 어떠냐”고 말하는 임순이 씨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임순이 씨 인생은 입양 보낸 아이들이 멀어져 버린 것으로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혼혈아와의 결혼, 자식과의 생이별, 그로 인한 미국에서의 체류, 불행했던 인생을 보상이라도 받는 듯 지금껏 받아보지 못했던 사랑을 주었던 미국 남편과의 만남, 그리고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등이 칡넝쿨처럼 얽혀있다.

임순이 씨의 첫남편은 혼혈아였다. 혼혈아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하던 당시, 딸 셋을 낳고 살았으나 남편은 직장을 꾸준히 다니기가 힘들었다. 아이들도 자신과 같이 사회적 편견 속에서 살게 될 것을 걱정한 남편은 미국으로의 이민을 결심했고 이민을 진행하던 중 비자 통보를 받은 날 교통사고를 당해 1년 후 세상을 떠났다.

여자 혼자 아이들 셋을 데리고 사는 것이 막막했던 임 씨는 주위의 권유로 입양을 생각하게 됐고 혼혈아였던 남편이 당했던 수모를 아이들은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에 결심을 굳혔다. 마침 당시 부평에서 고아들을 보살피던 신부님으로부터 세 아이를 원하는 미국 가정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양부모가 아이들을 데리러 온 것은 1987년, 양엄마 다나(Donna)와 양아버지 에드워드매센질(Edward Massengill) 씨는 임순이 씨에게 “일년후 88올림픽 때 아이들을 데리고 올 테니 그때 보라”고 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임순이 씨는 아이들을 보내고 난 후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느꼈으나 그나마 일년 후에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붙잡고 살았다. 그 당시의 힘들었던 상황을 임순이 씨는 “아이들을 보내고 방 한 칸짜리 집으로 돌아갔다.

자꾸만 밖에서 아이들 소리가 나는 것 같아 창을 열고 내다보면 아무도 없었다. 밤에 아이들 생각에 뒤척이다 잠이 들면 무서운 꿈을 꾸다 깨곤 했다.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양부모는 88올림픽은 고사하고 3년이 되도록 아이들을 보여주러 오지 않았다. 하루 하루 아이들 소식을 기다리던 중 1990년 어느날 보스톤에서 왔다며 양부모의 친구라는 장 씨가 찾아왔고 “아이들을 보고 싶으면 보스톤을 방문해도 된다”는 양아버지의 편지를 전했다.

임순이 씨는 서둘러 방문 비자를 받고 보스톤으로 향했다. 영어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임순이 씨가 보스톤에 아는 사람이라곤 얼굴 한 번 본 것밖에 없는 장씨뿐. 그러나 아이들을 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찾아온 임씨를 반기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나마 믿고 왔던 장씨는 양엄마 다나 씨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임씨를 도와주지 않았다.

오갈 데 없었던 임씨는 당시 양엄마와 별거중이던 양아버지 에드워드 씨를 따라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 “남들 보기에 이상했겠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따라가서 그 집에 있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며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그때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당시 양아버지 에드워드 씨와 양엄마는 별거중이었고 아이들은 며칠씩 두 집을 오가며 묵었던 때. 에드워드 씨는 양엄마 다나 씨에게 전화를 걸어 임순이 씨가 아이들을 보러 보스톤에 왔고 자기 집에 있다고 전했다. 그러자 양엄마 다나 씨는 아이들을 더 이상 양아버지 집에 보내지 않았다.

더구나 임순이 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서 숨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임순이 씨의 여권을 변호사에게 맡길 것을 요구했다. 임순이 씨는 아이들에게 행여 누가 될까 염려해 다나 씨가 시키는 대로 따랐고 6개월의 체류기간이 끝나도 돌아갈 수가 없어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그러나 임순이 씨는 “아이들과 한 동네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것 같아 행복했다”고 말했다.

임순이 씨는 고사하고 양아버지도 그날 이후로 아이들을 볼 수가 없었다. 입양한 아이들이긴 했으나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한 에드워드 씨는 임순이 씨와 동병상련의 심정을 나누며 아이들 사진과 비디오를 함께 보고 그리워 했다.

두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으나 사전을 찾아가며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정이 들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씨는 임순이 씨의 불행한 삶에 연민의 정을 느꼈고 임순이 씨는 에드워드 씨의 자상함과 인간적인 따뜻함에 끌렸던 듯. 결국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됐다. 물론 에드워드 씨는 이미 전부인과 이혼이 된 상태였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자 에드워드 씨의 전부인이자 양엄마인 다나 씨는 아이들에게 임순이 씨와 양아버지에 대해 좋지 않게 말했고 아이들은 더욱 두 사람을 피했다. 심지어 “마켓에 가서 만나게 되더라도 아이들이 숨어서 나오지 않았을 정도”라며 임순이 씨는 말했다.

큰 아이 고등학교 졸업식 때 꼭 가보고 싶었다는 임 씨는 양 엄마의 만류로 먼 발치에서만 보고 왔다며 “아이들이 잘 살고 있는데 내가 방해가 되면 안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내가 죄인이라 그 애들이 다 커서 자기들 발로 찾아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며 당시 심경을 전했다.

임 씨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세탁소에 나가 재봉일을 하기 시작했다. 재봉일은 임씨가 가난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린 동생들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해왔던 일이었으므로 일자리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후로 지금까지 쭉 일을 해온 임순이 씨는 현재 부룩스 브라더스(Brook’s Brothers) 사의 신입 재봉사원 슈퍼바이저이다.

임순이 씨가 양엄마의 허락 하에 헤어진 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건 15년만인 지난 2002년. 큰 딸 23세, 둘째 딸 22세, 막내 딸 19세가 되어서이다.

한 지인의 말에 의하면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딸들이었지만 미국인 엄마에게 양육된 세 딸들은 겉모습만 한국인일 뿐 정서나 생활방식은 미국인이었고 더군다나 한국어를 모르는 딸들과 임순이 씨는 지난 세월을 얘기할 만큼 긴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이들이 머리로만 엄마를 이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

그후로 지금까지 아이들을 몇번이나 더 봤냐는 질문에 임순이 씨는 두번인지 세번인지 정확히 기억을 못했다. 연락은 자주 하느냐는 질문에는 메일을 가끔 주고 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 그녀를 슬프게 하는 것은 딸들과의 거리감이 아니라 남편과의 사별이다. 어린딸들을 보기 위해 왔으나 생면부지의 사람들만 있는 곳에서 큰 위안이 되어준 남편이 지난 3월 19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뜬 것이다.
아이들의 양아버지이자 임순이 씨의 남편 에드워드 씨는 살아 생전 임순이 씨를 지극히 위해 줬다.

한 때 신학을 공부했던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밝히길 “아이들을 엄마에게서 떼어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짓이 아니다”고 할 정도로 입양한 후 임순이 씨에게 상당히 무거운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신의 일기에 “순이가 행복해 지도록 돕지 않으면 나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임순이 씨의 불행한 삶을 마음 아파했으며 평소 임순이 씨에게도 “애들이 엄마를 잊어 가는 게 마음 아프다. 당신이 한국을 가든 일본을 가든 중국을 가든 어디가서 살든 내가 돕겠다”고 말했다.

평소 이들 부부를 알고 지냈던 이종수 씨(남, 40대)에 의하면 “에드워드씨는 늘 남을 먼저 배려하던 분이었다. 교회에서는 주말학교 선생님을 하며 한국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으며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말을 배우려고 했다”고 할 정도로 친절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또한 임순이 씨가 한국에 온 지 12년 되는 해인 2002년 그녀와 함께 한국을 다녀올 때 전남편의 산소도 함께 다녀온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이다.

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씨는 임순이 씨의 기구하고 불행했던 삶을 책으로 내려고 했다. 그러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홈페이지(http://www.imsoone.com)를 만들어 놓고 임순이 씨가 걸어온 인생역정이 담긴 사진과 사연들을 올려 놓았다.

김현천 hckim@boston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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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목록    [의견수 : 1]
^^
2009.04.22, 14:58:21
정말 안타까운 사연이기는 하지만... 저는 22년간 3아이를 혼자된 몸으로 키워온 그 양엄마라는 분이 더 안타깝게 느껴져요. 아이들이 성인이 된지 오래이니 아이들 스스로가 원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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