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
고종황제의 보좌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미국인
한국사 최초로 연구한 서양인, 한국사 지대한 업적 남겨
보스톤코리아  2017-08-24, 21:22:35 
고종황제를 옆에서 보좌하며 세계와의 통로 역할을 했던 호머 헐버트는 일제에 의해 추방된 이후에도 매사추세츠의 스프링필드에 머물면서 한국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아리랑TV)
고종황제를 옆에서 보좌하며 세계와의 통로 역할을 했던 호머 헐버트는 일제에 의해 추방된 이후에도 매사추세츠의 스프링필드에 머물면서 한국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아리랑TV)
(보스톤 = 보스톤코리아) 김시훈 기자 =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한국 이름 헐벗. 그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이었다. 역사교과서에 한 두 줄 정도 짧게 언급되는 그이지만 그는 한국의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제암리 학살을 폭로한 캐나다인 석호필 (본명 프랭크 스코필드), 3•1운동을 지원한 아일랜드계 일본인 조지 쇼와 함께 대한민국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한 3명의 외국인 중 한명이다.

버몬트 주 뉴 헤븐 출신의 선교사였던 헐버트는 1886년 조선의 영어교사로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공부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에 실망한 그는 5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가지만 한국에서 일하다 일시 귀국한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1893년 다시 한국 땅을 밟는다. 

이 시기에 그는 외국 서적을 한글로 옮기거나 외국에 한국을 홍보하는 서적이나 기사를 번역하고 저술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아리랑을 최초로 서양식 악보로 기록 하고 1905년 800페이지 분량의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1906년에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등을 저술했다. 그는 한국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서양인이며, 서양의 한국사 연구는 그의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에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했고, 고종황제에게 국문연구소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는 3년 만에 한국어를 익혔다고 전해지는데 1891년에는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세계지리)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저술했다. 1908년에는 제자 오성근과 함께 ‘대한역사’라는 한글 역사서를 출판했지만 일본의 검열에 걸려 모두 불태워졌다. 그의 지대한 한글 보전과 발전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4년 한글날에 금관문화훈장을 사후 수상했다.

<일제의 압박에 저항하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자 그는 한국의 정치와 외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가 한국을 외국에 알리려 했던 활동 덕분에 고종황제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1893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다른 선교사 출신인 언더우드, 에비슨과 함께 고종황제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 그는 한국의 자주 독립을 지지하면서 고종의 최측근 자리에서 보좌하며 서방 강대국들과의 외교 관련 업무에 힘썼다. 

그는 타임스와 AP통신 객원 특파원을 맡으며 한국의 상황을 서방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특히 1907년의 헤이그 특사 사건은 그의 활동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다. 고종황제는 일본제국에 의해 부당하게 빼앗긴 외교권과 일본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비밀리에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덴 하흐, Den Haag)에서 열린 만국 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기로 한다. 비록 그는 직접 헤이그에 파견되지 않았지만 사전작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제 4의 특사로 불린다.

1906년 고종황제는 1905년 을사조약의 무효성을 알리기 위해 헐버트를 ‘특별의원’으로 임명하며 외교업무에 전권을 부여했다. 이에 그는 당시 한국과 수교했던 독일, 러시아, 미국, 벨기에,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청나라, 프랑스에 을사조약의 무효를 알리는 친서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헤이그 회의 일정이 다가오자 일본제국의 감시의 눈을 돌리기 위해 일본으로 이동하고, 일본의 눈이 헐버트를 향하고 있는 동안 이준, 이상설, 이위종 3명의 밀사는 이를 피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헤이그로 향했다. 헤이그에 도착한 3명의 밀사는 비록 회의장에서 입장을 거부당했지만 각국의 기자단과 시민단체 회원들 앞에서 일본의 부당함을 연설하였다. 

<죽어서도 한국 사랑을 실천한 헐버트>
헤이그 밀사 파견의 책임을 물어 일본은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헐버트를 추방했다. 1908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매사추세츠의 스프링필드에 정착했다. 스프링필드 훼이스 회중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받으면서도 그는 한국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미국 전역을 돌며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며 1917년 에는 3•1운동 이후 <한국을 어찌할 것입니까?(What about Korea?)>라는 질의서를 미 상원에 제출했다. 그 이후에도 미국 내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운동을 이어나가며 서재필, 이승만 등의 독립 활동을 도우며 미국 내 한인들을 독려했다. 

86세의 노령이 된 그는 1949년 7월 29일, 광복을 맞은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당시 한국으로 가는 배편에 오르며 그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90에 가까운 그의 나이에 한 달여에 가까운 여행은 무리였는지 한국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숨을 거뒀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국에 온 특별한 이유는 고종황제가 숨긴 비자금을 되찾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폐위된 고종황제는 상하이 독일운행에 숨겨둔 비자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할 예정이었다. 그는 죽기 직전 고종황제와 약속했던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한국 땅에 돌아왔지만 안타깝게도 입국 7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다.

지난 5일은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의 사망 68주년이었다. 그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68주기 추모식이 11일 오전 11시 그가 묻혀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 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에서 열렸다. 추모식에는 마크 내퍼 주한 미국대사 대리, 박유철 광복회장, 윤종오 서울북부보훈지청장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그가 1903년 제작한 거북선 모형이 114년만에 공개되었으며, 마지막 일본의 양심이리 불리는 고마츠 아키오 인간자연과학연구소 이사장은 한국인에게 사죄하고 일본의 전쟁책임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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