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줄잡이
보스톤코리아  2014-06-09, 12:10:51 
 태평양 이쪽 사람들은 저쪽을 그리워 한다. 저쪽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쪽을 궁금해 한다. 이맘 때면 저쪽에선 모내기가 한창 아니던가. 망종芒種이다. 보리는 익었을 테고, 벼모 심는 시기인 게다. 논밥에 막걸리 얻어 먹으러 찾아가야 할까 보다. 때 맞춰 광화문 글판 글을 받았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 간 줄 알아라
(정호승, 풍경 달다 광화문 글판 중에서)
  
 김포평야는 무지 넓다. 한강뚝을 경계로 저쪽 강은 당연히 검푸르고 도도한데, 이쪽 평야는 너무 넓어 까마득하다. 오늘 반드시 이 넓은 평야에 모를 다 심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더욱 나 혼자 모내기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레 겁이 마음에 아랫도리가 서늘해졌다. 찾아든 요기尿氣에 아랫도리가 저려왔고 다리에 힘이 이미 다 빠져버렸던 거다. 전의戰意를 완전히 잃었단 말이다. 한국군대 졸병시절 모내기에 ‘대민봉사’ 나갔을 때다. 

 새참시간에 귀에 들리던데, 그 모내기 팀은 못줄잡이가 모은 남쪽지방에서 올라온 여닐곱 아낙네들이라 했다. 그네들은 삯을 받고 모내기를 거들며, 남으로 남으로 고향을 향해 간다. 고향에 도착하면, 자신들의 논에 모내기를 마치고 모내기철을 보낸다 했다. 그 아낙들은 보통 일곱 여덟 몫을 어렵지 않게 해냈는데,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아 경이로웠던 것도 기억에 생생하다. 고작 세 몫을 나누어 꽂아대는 내 느린 손은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다.

  모내기날 오후는 일이 고되다. 하지만 일은 끝내야 하는데, 버티는 힘은 못줄잡이의 리더십에서 나오지 않나 싶다.  옆자리에 선 모내기 프로 아줌마의 도움도 중요하다. 물론 농주農酒의 힘도 빠질 수는 없다. 하지만 못줄잡이의 리더십이 먼저라는 말이다. ‘자, 줄 넘겨’ 못줄잡이 말은 차라리 선임하사, 동작그만 불호령보다 더 무서웠다. 옆줄에선 일꾼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허덕였으니 말이다.  

못줄잡이는 중년아저씨인데, 한 잔 막걸리 술에 취한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고, 막걸리보다 더 탁해 걸죽했더랬다. 간간이 섞이는 육담은 농주보다 더 걸쭉했는데, 아직 새파란 총각 병사들에게도 외설스럽지 않았다. 못줄잡이 중년 사내의 일은 신명나게 하는게 일이고, 모내기 일꾼들을 격려하는게 임무일 터. 그는 논물에 발을 담그진 않았다. 이런게 간단하다만 명징한 리더십의 본보기 아니던가. 일꾼들은 신나게 일하고, 일은 어려움 없이 마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논주인도 불만은 없었을 게다. 
  
   그 날 저녁 일을 마쳤을 때, 내 엉덩이는 허벅지까지 논물에 푸욱 절어 있었다. 꾸부리고 모를 꽂아 대느라, 다리 힘이 부쳐 주저 앉았던 거다. 허리를 펼 시간이 없었으니, 무릎이 자연스레 굽혀진 게다. 후둘거리는 다리를 주체할 수 없었으니 막걸리 기운도 소용 없었다. 당연히 엉덩이는 논물에 반쯔음은 담겨 밀려 내려갔다. 그래도 일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은 상쾌하기 그지 없다. 든든히 ‘사제’ 논밥에, 농주를 얻어 마셨으니 대만족이고, 그 너른 평야에 몇줄이나마, 쌀나무를 심었다는 만족감이라 해야 할까. 그 해 모내기일은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이다.
  
 한 마디 덧 붙인다. 논바닥 흙은 갯뻘의 그것과 감촉이 다르다. 같으면서도 다른데, 어떤 논은 물이 차다. 어떤 논은 물이 덥다. 물이 차면 찬대로, 맨발이 닿는 순간 소름이 돋는다. 물이 미적지근하면 미지근한대로, 감미로운 느낌은 아닌게다. 뭔가 섬짓하고 물컹인다.  하지만, 발이 논물에 익숙해지면서 감촉은 달라진다. 얇고 보드라운 점토가 발가락 사이를 뚫고 올라오면, 너무 간지러워 오히려 저릿저릿해진다는 말이다. 거머리도 그닥 징그럽지 않았다. 
  
 한국의 최고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 건 아닐 터. 잃었던 신명을 되찾아 주는게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못줄잡이가 하듯 말이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마태 23:10)


김화옥  (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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