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24) :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6)
보스톤코리아  2011-03-14, 15:33:34 
두만강과 백두산 그리고 용정의 유적
연변에서 두만강을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먼저 용정시 삼합(三合)에서 차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인적이 드문 구간을 통과하여 개산툰(開山屯)까지 달려봤다. 두만강 폭이 너르지 않아 맞은편의 조선(북한)의 마을이 훤히 보이고 강가에서 빨래하고 미역감는 사람들이 손에 닿을듯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두만강변에 가끔 나타나는 중국 측의 마을도 대체 조선족마을이기에 서로 너무 비슷하여 국경이라는 의식이 없이 양측을 바라보면 똑같은 민족이 하나의 강을 사이두고 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다음 개산툰에서 도문(圖們) 사이를 차로 달렸는데 이 구간은 두만강 양안의 산들이 험준하고 그 때문에 경작지가 많지 않았다. 조선의 산에는 최고지도자를 칭송하는 문구가 가끔 보이고 역전마다 김일성 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이 강건너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중국에서 60,70년대에 있던 지도자에 대한 극단적인 개인숭배가 아직도 조선에 남아있는 것이 서글펐다. 중국측의 국경도시인 도문에서는 두만강변에 관광객이 많이 모이고 두만강에 들어가 뱃놀이도 많이 하는데 조선쪽은 조용하고 나다니는 사람도 그리 보이지 않았다.

도문에서 다시 차로 두만강을 따라 두만강의 최하류인 방천(防川)까지 갔다. 훈춘(琿春)시가지를 지나면서 보니 소문대로 훈춘시 개발이 많이 진척되어 연변의 도시중에서는 연길이외에 제일 번화한 모습이었다. 훈춘시의 권하(圈河)세관을 통하여 조선 쪽으로 화물트럭이 건너가는 모습도 목격되었다.
길이 600킬로에 이르는 두만강의 많은 구간을 답사하면서 연변의 조선족이 제 모국과 진짜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측도 대체 조선족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어 양측의 차이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중국 조선족이 한반도에서 이민한지 100여년이 지나도 언어에서 문화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이 변화가 생기지 않은 근본원인이 바로 모국과의 근접성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두만강 대안의 조선쪽이 너무 조용하고 활기가 보이지 않은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그 쪽도 이제는 천지개벽이 일어나 두만강 지역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프론티어로 떠오르는 날도 멀지 않다고 믿고 싶었다.

연변에 체류하는 사이 백두산에도 두번 다녀왔다. 운 좋게 처음 갔을 때는 천지가 똑똑히 보였는데 두번째 가니 백두산 정상에 안개가 진하게 끼어 천지가 전혀 보일질 않았다. 날 개인 날 백두산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보니 시야가 확 트이는 가운데 검푸른 수해(樹海)가 아득하게 펼쳐지고 연변의 산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란 바로 이런 기상을 보면서 키워가는 것이겠다 생각됐다. 백두산을 관광하면서 보니 한글간판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1987년에 처음 백두산에 갔을 때는 한글간판이 꽤 보이던 생각이 났다.

들으라니 2005년에 백두산(장백산)관할권이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길림성으로 이관(移管)되면서 한글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 이관이 연변의 관광산업에 불리했는지 아니면 결과적으로 백두산관광을 활성화시켰는지 상세한 결과는 잘 모르겠다. 그런나 중국의 조선족들이 항상 자랑스러워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경내에 있던 백두산에서 행정관리권의 이관에 따라 한글이 사라진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된다.

용정에 새로 복원된 대성(大成)중학교와 윤동주 생가도 방문했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고 복원과정에서 한국의 도움이 컸던 것 같다. 고향에 이렇게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었다니 가슴뿌듯했다. 실지 연변지역은 오래동안 동북아시아의 변방이면서도 잘 알고 보면 유서가 깊은 곳이다. 발해왕국이 여기서 건국됐고, 조선왕조, 청나라의 시조(始祖)들이 여기서 일어섰다. 일제강점기에는 백의민족의 투혼과 자존이 마지막까지 지켜진 곳도 여기이다.

남북의 만남의 장소
연길에서 체류하면서 연변대학교 근처에 있는 호텔 앞을 지나는데 한 무리의 젊은 여성들이 모여서 체조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연길시의 어느 직장에서 직원들에게 훈련을 시키는 줄로 알았는데 알고보니 조선(북한)에서 운영하는 식당의 종업원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조선식당으로 여러번 찾아갔다. 손님은 한국사람이 많은 편이고 그리 붐비는 식당이 아니었다. 중국의 일반식당에 비하면 종업원들의 태도가 딱딱하고 부드럽지 못했다. 의아스러운 것은 그 식당 입구에 일본식 등롱(燈籠)이 한줄로 쭉 걸려있었는데 이런 인테리어는 어디에서 나온 발상인지 궁금했다. 혹시 일본식 등롱인 걸 모르고 걸어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길에는 조선에서 경영하는 식당이 여러군데 있었는데 어디나 한국손님이 많이 온다고 들었다.

연길의 서점에 가보면 한국과 조선의 서적, 영상물, 음반들을 한곳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사실 해외에서 남북의 출판물들을 동시에 접할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못하다. 그런 면에서 연변에는 남북의 정보가 다 모이고 여러형태로 남북의 교류가 여기를 통하여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08년10월에 연길에서 개최된 학술희의에 참가했는데 이 회의는 연변대학교와 한국과 조선의 학술기관에서 공동으로 개최하고 남북양측에서 학자들이 많이 모여서 열띤 토론을 가졌다. 역시 중국의 조선족 사회가 남북을 이어놓는 가교적 역할이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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