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23) :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5)
보스톤코리아  2011-02-28, 13:21:20 
발전은 많고 조선족은 줄고 2009년 8월4일 나는 북경을 떠나 연변으로 갔다. 24일에 연변을 떠나기까지 20여일간 체류하면서 두차례의 학술회의에 참가하고 친척과 지인들을 만나고 연변 각지를 여행했다. 1988년에 일본에 유학한 후 연변으로 가끔 돌아갔어도 매번 체류기간이 짧았기에 고향에 가서도 가고 싶은 곳을 다 가지 못하고 총총히 떠났는데 이번에는 여유를 가지고 연변 각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중국의 다른 지역과 같이 연변의 변화도 컸다. 외국에 오래간 있다가 연변으로 가보면 몇가지 큰 변화가 눈에 띤다.

우선 어느 도시에나 아파트가 많이 늘어났다. 이제는 어지간하면 아파트에서 사는 시대를 연변사람들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연변에서는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서 아파트를 많이 산다고 들었다.
그 다음 도로가 좋아진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연변의 주요도로가 거의 다 아스팔트나 콩크리트 포장도로로 바뀌고 고속도로가 통하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내가 외국에 거주하면서 중국을 방문하면 언제나 제일 큰 변화를 느끼는 것이 교통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중국에 고속도로망이 전국에 널리고 고속철도도 보급돼가는 과정에 있다. 그런데 차로 연변 각지를 달리면서 느낀 것이 국도에 콩크리트도로가 쾌 많은데 이런 길에서는 차가 상하로 털렁거리기에 승객들에게는 편하게 승차할 수 있는 도로가 아니었다. 콩크리트도로가 보수비용이 적게 들어 도로를 관리하는 측면에서는 경제적이겠지만 승객을 생각하면 아스팔트가 낫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연변의 큰 변화가 자가용차가 많아진 것이다. 이제는 연변의 도시에서는 마이카시대가 급속하게 다가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변대학교 교수들을 보니 아마 거의 절반은 마이카를 운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외국의 산업화 국가들에서는 마이카가 오래전에 보급되었기에 신선한 얘기가 아니지만 마이카시대는 중국으로 말하면 큰 변화가운데의 하나이다.

연변 각지를 다녀보면 삼림이 비교적 잘 보호되어 있어 민둥산이 거의 보이지 않고 산들이 울창한 수림으로 덮어있어 좋았다. 듣자니 이제는 삼림보호를 위하여 벽돌공장도 운영을 금지시키고 있다고 한다. 연변지역만큼 전지역에 수림이 울창한 곳도 중국에서는 적기에 자신의 고향이 자랑스러웠다.
친척이 정부에서 운영하는 노인양호시설에 들어있기에 찾아가봤는데 자녀가 없어 의지할 수 없는 노인들을 정부가 무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각지에 정부에서 운영하는 노인양호시설이 설치되어 있다한다.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정책이 돋보였다.

그러나 연변도 잘 살펴보면 어두운 그늘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농촌마다 폐가가 눈에 띄고 조선족마을에 조선족이 줄어드는 현상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었다. 중국의 연해지역으로, 한국으로 돈을 벌려고 떠나면서 조선족마을에 조선족이 부재했다. 일본이나 한국을 봐도 산업화과정에서 이농(離農)현상은 다들 생기는 것이지만 문제는 소수민족지역에서의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은 그 민족의 공동체기반이 무너져내릴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연변 내의 도시에서도 조선족이 줄어들기는 마찬가지여서 이제는 조선족 식당에 가봐도 젊은 조선족 종업원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연변에 남아있지 않고 직장을 외지에 나가서 찾는 것이 이제는 사회의 추세처럼 되었다. 그러고 나니 연변에 남아있는 조선족은 노인이나 어린이들만이라는 말이 과장처럼 들리지 않았다. 백두산관광을 가면서 연길시 주변의 농촌을 통과했는데 한족가이드가 설명하기를 여기의 마을들에는 원래 조선족들이 살았는데 한국에 돈벌러 나가면서 이제는 별로 남아있지도 않다고 했는데 이것이 다른 민족의 눈으로 본 연변의 현실이었다. 원래는 외지나 외국에 가서 돈을 벌어서 고향을 잘 발전시키고 고향에서 자긍심을 가지고 안착하여 사는 것이 이상적인데 오늘날의 조선족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여 유골마저 날려보내는 세태에 연변조선족의 애향심이 장구하게 남아있을련지. 부모의 산소라도 남아있어야 고향도 찾아가고 싶고 애착도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연길의 형님집에 거주하면서 아침마다 연변텔레비의 조선말채널을 시청했는데 7시가 되면 아리랑곡이 흘러나와 그런때만큼 반가운 것이 없었다. 또 아침이면 형님네 아파트 밖에서 ‘두비(두부) 삽소’하는 고향 아줌마의 귀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일상생활에서 조선적인 것을 누리면서 사는 삶, 이것인즉 연변에 사는 조선족의 특권이고 살아가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연변이 더 소중하게 여겨졌다. 연변을 떠나기 직전 모아산(帽兒山)정상에 올라 고향땅을 바라봤다. 급속하게 현대도시로 탈바꿈해가는 연길, 백사장을 적시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해란강, 사과배 향기 풍기는 용정의 만무(萬畝)과원, 산마다 일직자로 늘어선 낙엽송과 솔나무, 다시 보니 고향땅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우리가 너무 제 고향을 모르고 살아온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깊게 들었다.
연변을 떠나는 날 연길공항은 몹시 붐볐다. 나이든 조선족 분들이 짐을 가득 챙겨가지고 한국으로 돈벌이 떠나고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서 배웅을 하고 있었다. 한번 나가면 몇년은 쉽게 돌아오지 못할 걸음이어서 가족 사이의 작별이 애틋했다. 한세기 이전에 찢어지는 듯한 가난과 망국의 설움을 안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두만강, 압록강을 건넜던 사람들의 후손들이 오늘도 또 무거운 짐을 끌고 살길을 찾아 고국으로 향한다. 조선족에게 아리랑고개는 길고도 또 길다.

김광림
Professor, Niigata Sangyo University
Visiting Scholar, 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 Harvard Univesity
E-mail:guanglinj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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