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견디는 방식(12)
보스톤코리아 연재소설
보스톤코리아  2018-10-15, 12:30:23 
마당에서 화분을 손질하는 남편에게 수정과를 떠다 주며 남편의 엉덩이를 툭툭 치고는 허리를 굽히고 얼굴을 돌려 남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 살짝 웃어준다. 은미의 바램은 죽는 날까지 철없이 사는 것이고 남편이 늘 자신의 치다꺼리를 혀를 차면서도 보호자로서의 의무를 즐겁게 할 수 있도록 끝까지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어 주는 것이라고 한다. 남편이 육십 이후에 은미를 따라 배운 도자기에 미쳐 도예전을 하고 있는 중인데 신이 나서 저렇게 들락날락한다고 했다. 은미는 남편의 도자기 실력을 제 새끼손가락을 치켜드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다부지고 명쾌하고 단순한 남자를 아직도 유혹적으로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남편을 향해 뿜어 댄다. 

은미를 만나고 온 후 나는 사는 일에 있어 정답은 없으며 어떤 과정을 어떻게 거치고 있든 현재의 내가 얼마나 자유스러운가가 삶의 질과 연결된다고 생각되었다. 남편과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생활은 드라마를 쓰는 것으로 얼추 유지되었고 남편은 알뜰했다. 집안의 공기는 조용하게 흘렀다. 발랄한 아이의 목소리가 가끔 그 공기를 흔들었지만 아이도 서서히 우리 내외를 닮아가며 컸다. 우린 밥 먹으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난 드라마 대본 속으로 들어가고 남편은 드라마나 오락 프로 속으로 들어가고 아이는 컴퓨터 게임 속으로 들어간다. 난 드라마 대본을 쓰며 돈을 벌고 남편은 살림을 잘 했으며 아이는 공부를 곧잘 했다. 우리 세 식구는 아주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았다. 이제 남편의 머리도 하얀 머리카락이 소복하게 올라오고 아이는 다음 달이면 대구로 이사를 나간다. 난 여전히 드라마를 쓰고 있다. 우리의 삶에는 감정의 기복이 빠져있다. 내부의 감정을 밖으로 내놓았을 경우, 후폭풍에 과감히 맞설 용기를 상실한 것이다. 새로 시작할 드라마 시놉시스를 쓴다. 이름은바꾸겠지만 감정 이입을 위해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난 은미의 이름을 쓰기로 한다. 

--- 만화를 보는 은미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뭔가가 기어 다니는 게 보인다. 나는 그게 뭔가 보려고 가까이 다가 앉는다. 이가 기어 다닌다. 서캐도 제법 있다. 난 은미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영문을 모르고 따라온 은미를 마루에 눕히고 난 이를 잡기 시작했다. 가끔 징그럽다는 느낌 때문에 속이 메슥거리기도 했지만 양 엄지손가락 손톱 사이에 서캐를 놓고 누르면 나만 알 수 있게 무엇인가가 터지는 느낌이 전달된다. 제법 큰 이가 잡히면 신문지 사이에 넣는다. 기어 다니는 방향으로 필통을 바닥에 붙여 쭉 밀어 버린다. 은미는 부끄러워하다가 금세 이잡기놀이에 익숙해진다. 마루 끝까지 들어왔던 햇볕은 이제 마루 끝에 걸려 있다. ---

바람에는 여러 개의 냄새가 있다. 비가 오기 직전의 바람과 비가 온 후의 바람 그리고 이별 뒤에 느껴지는 바람, 처음으로 화장을 하고 대문을 열었을 때 만난 바람, 친구가 느닷없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창문을 열었을 때 만나게 되는 밤바람……. 내가 만난 사막 같은 청춘의 모래바람은 도전, 솔직함, 발랄함, 싱그러움, 욕망 …이런 살아 있는 감정들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은미는 나보다 더 일찍 그 모래바람을 맞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관습을 현실적인 이해득실과 바꾸는 것으로 사막의 바람을 견디었다. 자신의 감정을 다 드러내고 사는 것으로 나이 든 이후로는 격의 없는 친구가 되어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러는 동안 내부의 갈등이 왜 없었겠는가. 은미의 그림은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를 연상하게 한다. 늘 겉과 속이 구분되지 않고 하늘과 땅도 구분되지 않는다. 화석이 된 물고기 속에는 슬픈 눈의 또 다른 물고기가 있다. 물고기 뱃속에서는 나무가 자라나 아가미를 지나 뻗고 있었으나 밖은 사막이다. 나무의 끝은 닿을 듯 말 듯 별을 향하고 있다. 말라가는 싹을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단 한 그루의 나무 그림을 본 순간 은미의 입술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다 나무 이파리로 보였다. 난 대학을 포기하고 드라마를 시작한 이후 모든 대화를 시나리오에 풀어 넣었다. 기본적으로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희망을 놓아 버렸다. 사람에게 별로 희망이 없었다. 그것은 사람이라기 보다 내 욕망의 전부를 사장시킨 스스로를 향한 공격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나를 망가뜨리는 것으로 내 의사를 표현하는 못된 기질이 있었다. 난 사람에게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이 나를 향한 공격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저 약간의 우울이 있고 그 우울이 시나리오를 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니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 나도 한번 울어 볼까?라고 생각해 봤다. 
(다음 호에 계속)


유희주 작가
유희주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2000년『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인간과 문학』에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며 소설 작품 활동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 (푸른사상)』이 있다. 
유희주 작가는 매사추세츠 한인 도서관 관장, 민간 한국 문화원장, 레몬스터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코리안릿닷컴(koreanlit.com)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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