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빛 (4)
보스톤코리아 연재소설
보스톤코리아  2018-05-14, 10:31:08 
량의 직장에 한 미국인 남자가 찾아왔다. 샤오위를 찾던 남자는 샤오위를 보자마자 덥석 안고는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럴 때마다 샤오위가 살짝 움츠러들며 한편으로는 웃음소리를 냈다. 남자가 샤오위와 밖으로 나가고 열세 명의 여직원들은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멸스럽다는 듯 입을 비틀며 그들의 뒤태를 바라봤다. 샤오위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친구를 통해 미국 남자를 알게 되었다. 그 남자가 미국에서 어찌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나이가 샤오위 보다 무려 25살이나 많았다. 량보다는 22살이 많은 늙은 남자라는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 샤오위가 곧 남자를 따라 미국을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미국에서 결혼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중국 여자와 결혼하러 중국에 오는 것은 제법 흔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난 5년간 공장의 여공들이 벌써 3명이나 미국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량의 눈이 반짝이며 심하게 깜박거렸다. 량은 샤오위의 결혼 준비를 도왔다. 별다른 것은 없다. 몸만 가면 되는 것이었지만 남자가 중국에 왔으니 중국 안내를 하고 이것저것 수발을 들어야 했는데 샤오위는 부끄러움도 많고 남자의 나이 때문인지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러니 몸도 열지 못했다. 남자는 나이가 많았으나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라도 필요할 만큼의 동물적 감각은 남아 있다. 그것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 달 뒤 미국으로 떠난 건 샤오위가 아닌 량이었다. 량은 비행기 안에서 남자의 품에 안겨 잠이 든다. 남자는 샤오위 보다 몸이 풍만하고 애교 있는 여자를 얻게 된 것이 흡족했다. 남자가 샤오위와 쇼핑 약속을 했을 때 먼저 도착한 량과 잠시 가게에 들어갔었다. 그 좁은 골목길이 가게 옆으로 없었다면 오늘 남자는 샤오위와 함께 비행기에 탔을 것이다. 두 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는 좁은 골목길에서 량은 넘어졌다. 아니 넘어지는 척했을까? 남자가 부축하자 젖가슴을 남자에게 밀착시켰다. 아픈 다리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앙증맞게 짓기도 했다. 량을 부축한 남자는 셔츠 단추가 뜯어져 나간 셔츠 사이로 젖가슴을 봤다. 브리지어도 안 했고 젖꼭지는 딱딱하게 솟아 겉으로 도드라져 있었다. 남자가 잠시 숨을 고르다 량을 한참 들여다봤다. 남자는 직감적으로 량의 계획적인 접근이 자신에게도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량은 가만히 남자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출국은 삼 일 뒤였다.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으로 들어설 때 샤오위가 입구에 서 있었으나 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중국의 하늘은 너무 뿌옇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그 뿌연 공기를 마시며 서서히 모래처럼 부서질 날을 향해 걷고 있었다.
미국에 온 뒤로 남자는 량에게 말을 가르치지 않았고, 운전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냥 남자의 옆에서 여자로서 해야 할 일만 요구했다. 이유는 그것이 량에게 안전하니까 였지만 량은 본능적으로 이러한 삶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지금은 이렇게 숨죽이고 살아야 할 때라는 것을 안다. 량은 남편이 없는 사이에 영어 단어와 문장을 무작위로 외운다. 하루 종일 그것을 입으로 중얼거린다. 남편도 모르게 남편의 그 텁텁한 입 냄새나는 친구들도 모르게 외우고 외우고 외운다. 절대 남편이 보는 데서는 영어를 쓰지 않는다. 남편이 없는 날이면 량은 미친 듯이 A와 B의 역할을 하며 문장을 외운다. 하지만 아무리 외워도 써먹을 수가 없다. 운전을 할 수 없는 량은 늘 남편과 움직여야 한다. 마트에 가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뿐이다. 남편은 량의 눈동자를 살핀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린다. 그것은 마트 내의 모든 것, 물건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다 기억해 두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남자도 안다.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량의 등을 슬쩍 밀며 주차장을 향해 걷는다. 처음엔 괜찮았다. 언젠가는 이 감옥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버텼다. 2년 6개월이 넘기 시작하자 량이 감추고 있었던 증세가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린 날의 회초리, 양은 냄비, 남편, 아들, 엄마…. 무작위로 생각나다가 그 펄펄 끓는 물이 제일 나중에 떠올랐다. 그러면 량의 발작 증세가 시작된다. 공황장애라는 것을 남편도 량도 알고 있었다. 남편은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자신이 량을 위해 개발한 치료법을 빼곡하게 써 놓기 시작했다. 량은 성실하게 그 치료법에 따랐다. 남편이 개발한 방법들은 제법 효과가 있었다. 그중 마당에 나가 채소를 가꾸고 나뭇가지를 쳐 주고 잡초를 뽑아주는 일은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가 조깅을 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것이 이유였고 량도 위험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에는 뉴욕에서 엄마를 보러 온 딸이 조깅을 하다가 실종되었다. 아직도 찾지 못했다. 량은 속으로 ‘그 여자는 도망갔을 거야’라고 읊조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유희주 작가

유희주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2000년『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인간과 문학』에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며 소설 작품 활동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 (푸른사상)』이 있다. 
유희주 작가는 매사추세츠 한인 도서관 관장, 민간 한국 문화원장, 레몬스터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코리안릿닷컴(koreanlit.com)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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