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르고의 영어잡설 14] 손기정은 왜 '마라손'을 뛰었을까?
보스톤코리아  2018-04-30, 10:36:56 
손기정 옹은 왜 '마라손'을 뛰었을까? 자신이 '손'씨니까 마라'손'을 뛴 것일까? 황영조나 이봉주는 마라'손'이 아니라 마라'톤'을 뛰던데. 필자는 지금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흑백 필름으로 남아있는 손기정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 그는 [마라톤]이 아니라 [마라손]이라고 발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물론 자신이 '손'씨 이기 때문은 아니다.

일제시대에 살았던 손기정은 일본식 영어를 배웠고, 일본식 영어는 영국식 영어를 받아들였다. 일제시대에 영어를 배운 분들이 energy를 [에너지]가 아니라 [에네르기]라 발음하는 것을 보라. allergy를 [앨러지]라 하지 않고 [알레르기]라 하는 것을 보라. 일본어에는 /어/가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미국영어에서는 -th-를 /ㄸ/에 가깝게 발음하는 데 비해, 영국영어에서는 /ㅅ/에 가깝게 발음한다. 그래서 손기정은 marathon을 [마라손]이라 발음했던 것이다. 요즘 우리는 미국영어를 배우기 때문에 [마라톤]이라 발음하지만, 정확한 발음은 [매러쏜]에 가깝다. 소위 번데기 발음 /ɵ/ 말이다. 똑같은 thank you를 영국영어에서는 [쌩큐], 미국영어에서는 [땡큐]라 한다. 물론 정확한 발음은 위아래 이빨 사이에 혀를 댔다가 떼면서 발음하는 /ɵ/이다.  

번데기 발음 /ɵ/는 우리말에 없기 때문에 발음하기 어렵고 표기하기도 어렵다. 우리에게만 어려운 게 아니다. 사실 영어를 제외하고는 번데기 발음을 사용하는 언어가 없다. 영어의 아버지 언어쯤에 해당하는 독일어에서도 번데기 발음은 그냥 /d/로 대치된다. 즉 thank는 danke, this는 dieser가 된다. 영어와 친척뻘인 노르웨이어에서도 there은 der, this는 dette, thank는 Tak이다. 간단히 말하면 번데기 발음은 참 어렵다는 것이다.  

영국, 하면 떠오르는 정치가들이 몇 명 있지만 Margaret Thatcher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의 정치가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름 때문이다. thatch는 지붕을 이을 때 쓰는 '이엉'인데 thatcher라면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란 뜻이 되겠다. 아마도 Thatcher 수상의 조상이 지붕을 잇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필자의 대학교 은사 중 한 분이 영국에서 공부를 하신 저명한 학자셨는데 Thatcher를 언제나 [마가렛 새처]라 부르곤 하셨다. 당시 우리나라 모든 언론에서 그녀를 마가렛 대처라 하는데, 그분은 왜 [새처]라 부르는지 의아했었다. 영국영어에서는 -th-가 /ㅅ/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확한 발음은 번데기 발음이라 하는 /ɵ/임에 틀림없다. 요즘에는 유튜브도 있고 구글도 있고 파파고도 있어서 원하면 언제든지 정확할 발음을 들어볼 수 있으니 참 편한 세상이다.  

며칠 전 일이다. 필자의 지인이 어떤 사람에게 fifteen이라고 여러 번 말해도 알아듣지를 못해서 난감해 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필자가 참견을 했다. "one five." 그러자 그 미국인이 금방 알아듣는 것이었다. 필자의 지인도 one five란 단어는 쉽고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당황하게 되면 아는 단어도 잊어버리고 발음도 꼬이게 마련이다. 미국 사람들끼리도 15와 50은 헷갈리기 때문에 정확히 하려고 one five 혹은 five zero란 말을 쓰기도 한다. 잘 통하지 않을 때는 정확한 발음을 하려고 애쓰다가 점점 더 이상한 발음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차라리 눈치에 의지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번데기 발음 /ɵ/도 마찬가지이다. 정확하게 발음하려고 애쓰기보다 다른 단어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자신의 어떤 발음이 잘 통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자신이 취약한 발음을 곰곰 생각해보고 플랜 B를  생각해두는 것도 한 방법이다.


올댓보스톤 교육컨설턴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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