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갑오경장 7
보스톤코리아  2011-10-03, 15:36:41 
조선의 자주독립과 내정 개혁은 국가와 민족의 장래 발전을 위하여 실로 중요하고도 거대한 유신과업이었다. 이 유신 정책을 위한 개혁 사업인 소위 갑오경장은 청일 전쟁과 동시에 시작된다.
그런데 조선이 내정 개혁을 단행하여 문명개화를 하는 것은 조선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인데 무엇 때문에 일본 정부가 팔을 걷고 나서서 남의 나라의 정치 개혁에 핏대를 올리면서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조선의 내정 개혁을 힘으로 밀어 부치려는 일본의 저의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주장하기를 조선을 도와 자주 독립 국가로 부흥케하고 나아가 그 나라로 하여금 문명 국가로 거듭나게 해주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 개화시대의 선구자라고 일컫는 후꾸자와 유기지는 청일전쟁을 문명 개화의 진보를 시도하는 자와 진보를 방해하는 자와의 전쟁이라고 했다. 옳은 말이다. 조선의 문명개화를 촉구하려는 일본과 그것을 반대하는 중국과의 전쟁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이 조선을 도와 정치 개혁을 단행하고 자주 독립 국가로 부흥케 해주겠다는 일본의 대 조선 정책은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이었는가, 이다.

그것은 조선 침략의 일환에서 이루어지는 술책이 아니었는가,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우에무라 세이지(上村淸次)교수는 청일전쟁을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은 지리적 또는 정치적으로 중국과 너무나 친근한 관계에 있어서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은 유구(1876년에 일본은 유구를 중국에서 분리시켜 오끼나와 현으로 만들어 통합하였다) 의 경우와는 비교도 안되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정치내지 경제적인 이익 때문에 조선에 진출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조선에서 내란이 일어났다. 일본은 그것을 기회로 출병하여 중국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청일전쟁이다. 라고 논평하여 청일전쟁을 조선 침략의 수단으로 자행된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조선의 내정개혁을 위해서 중국 즉 청나라와 반드시 전쟁을 벌여야만 하는가, 를 가지고 의회내외서도 청일전쟁의 위험성에 대하여 논란이 벌어져 의회의 해산까지 몰고 갔던 것이다. 그러나 제 2차 이토히로부미 내각은 중일관계를 어떻게 하면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전쟁을 피하려고 노력하기 보다 오히려 전쟁을 감행하여 어떻게 하면 청나라에 이길 것인가를 가지고 의논하면서 전쟁으로 몰고 갔다.

일본의 군부와 외무성이 전쟁을 결의하고 나섰다.
청일전쟁을 주도적으로 계획한자는 이토히로부미 총리 대신과 무쓰오 무네미쓰 외무대신 그리고 주중대사 고무라주다로였다. 일본의 이토히로부미 정부는 조선의 동학난을 계기로 해서 조선반도를 아주 일본의 속방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하면서 출명을 간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그것을 은폐하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면서 조선의 자주 독립과 문명 개화를 돕는다고 조선의 내정 개혁을 밀어 부치려고 하였다.

일본은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분리시킨 다음 괴뢰정부를 세워 자기네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밀접해 있을 뿐 아니라 오랜 역사를 통하여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중국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청왕조는 본래 발해국의 속국이었던 여진족이 1644년에 중국을 통일하고 정복왕조를 세운다음 한당의 중화주의를 본받아 변방의 약소국가에 대하여 조공과 책봉을 강요하면서 종주권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변방국가들은 그 세력을 당하기가 어려워 속방 또는 대국의 예로서 청나라를 받들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 문명이 급격한 침투로 동북 아시아의 정세에 큰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1854년에 개항은 일본은 왕정복고를 성취한 다음 메이지 신 정부는 유신 개혁을 단행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 동북 아시아의 패권을 주도하려고 나선다. 한편 중국 청나라의 동치(同治)황제는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여 문명 개화하려는 양무(洋務)운동을 전개 했으나 성공치 못했다.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청나라는 1840년의 아편전쟁과 1856년의 알로호 사건 그리고 1864년의 태평천국의 난을 겪으면서 서구열강의 무력에 무릎을 꿇고 남경조약(1842년) 천진조약(1858년) 북경조약(1890년)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여 홍콩, 광동, 상해 등의 5개항을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손을 들고 만다.

전근대적인 체제에 안주하여 개화를 거부하다가 선진열강의 침략을 감수한 것이다. 이 같은 세계의 정세와 중국의 약세를 볼 때 이때야말로 중국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주 독립을 성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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