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96
보스톤코리아  2015-09-07, 11:43:04 
김운용은 국기원 원장을 맡은 후 세계태권도연맹(WTF)을 결성하여 총재를 역임하였다. 그는 1973년 부터 2004년까지 총재로 재임하였으며, 2004년 부터 현재까지는 조정원이 총재로 있다.(조정원은 경희대학교 총장으로 있다가 2004년 세계태권도연맹 회장직에 피선되었으며 경희대학교 설립자 조영식, 1921~2012, 의 장남이다) 

김운용의 스포츠외교 능력은 태권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스포츠를 한 단계 더 격상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78년 우리나라에서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열렸다. 큼지막한 국제대회 개최의 경험이 없었던 우리나라는 이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가 대단한 자랑이었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곧 올림픽을 개최하자는 '꿈’을 가지고 노력한 결과 10년 후인 1988년 우리는 인류 최고의 스포츠 제전인 올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하였다. 이 '서울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어 올림피언들에 의해서 국제무대에 선보였다.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이기는 하였지만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아직 영향력이 없던 김운용은 1978년에 개최된 제42회 국제사격대회를 유치하면서 그의 스포츠외교 능력을 인정받았다. 1974년 당시 대한사격연맹 회장은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가 맡고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국제사격대회 유치를 추진하였다. 그해 10월 스위스의 수도 베른(Bern, Switzerland)에 있는 국제만국우편연합(IPU) 건물에서 개최된 국제사격연맹 총회에서 우리나라의 개최가 결정되었다. 사격연맹 회장 박종규는 1974년8월15일 광복절 기념행사장에서 문세광의 육영수여사 저격사건으로 경호실장직을 사표내고 나서 근신하고 있었기에 대한 체육회 부회장과 한국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던 김운용이 박종규의 부탁으로 국제사격연맹 총회에 우리나라를 대표하여 참석해서 사격대회 유치권을 따왔다. 김운용은 내키지 않았지만 간청에 못이겨 '이길 자신이 없다'는 전제하에 대표단을 이끌고 갔다. 당시 개최 신청국가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멕시코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중도에 포기하였고, 당시로서는 국제무대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던 멕시코가 유치권을 딸 것으로 예상되었지만,(멕시코는 이미 올림픽과 펜암대회 등의 최상급의 국제 대회를 치룬 경험이 있었다) 결과는 우리나라가 결정되었다. 당시 멕시코의 사격연맹회장은 후일(1979년) 국가 올림픽 총연합회(ANOC) 회장과 IOC 위원(1981년)을 지내게 되는 국제 스포츠 거물인 마리오 바스케스 라나(Mario Vazquez Rana)140) 가 맡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도 뒤떨어져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물가가 쌌다. 그래서 하루 선수들의 숙식비를 미화 $10로 제시한 멕시코에 비해 김운용은 "우리는 1~2억원을 더 쓰더라도 하루 숙식비를 $5로 제안했다."고 했다. 그 비용이 개최지를 결정하는데 변수로 작용했는지는 몰라도 제42회 국제사격선수권대회는 서울로 결정되었다. 현재의 우리나라 위상이나 국제대회 개최능력에 비춰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쾌거였고 성공리에 치룬 대회는 체육인들 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에게 자부심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영국의 유명한 기자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의 저서 <올림픽과 혁명>과 <IOC 100년 공식역사>에 보면 이 사격대회의 서울 유치는 '동북아 정치 지정학적 지각변동'이라고 불렀다.141)  

이 사격대회를 성공리에 마친 직후 올림픽을 개최하자고 거론되었으며, 1979년 봄 '국민체육심의회'라는 공식기구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김운용과 최규하 국무총리, 김택수 IOC위원, 정상천 서울시장, 박창현 문교부장관, 박종규 사격연맹회장 등이 참석하여 올림픽 유치 여부에 관하여 논의하였지만 박종규만 찬성하고 나머지는 모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외교정치에서 스포츠 교류를 먼저하고 다음 단계로 경제적인 교류 그리고 정치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됨은 모두가 알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약 40개 국가와만 국교가 있었기에 현실의 벽은 높아 보이기만 했다.  

140) 국제스포츠계의 기인, 그는 대통령 경호직으로 부를 축척하였고 '뭔가 된 것처럼 으시대고 목에 힘주는 타입'이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돈때문인지는 몰라도 넘어갔다. 1991년 노태우 대통령이 UN연설을 마치고 멕시코 국빈방문 당시 그의 자택으로 초청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멕시코의 전직 대통령이 두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141) kimunyong.com, '김운용이 만난 거인들' 마리오 바스케스 라나 ANOC회장 편 참조 
('김운용이 만난 거인들'은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다. 중앙books)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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