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68
보스톤코리아  2015-02-16, 12:07:35 
그럼 태권도의 역사는 어떠한가? ‘택꿘도’ 또는 ‘태꿘도’로 발음되는 ‘태권도跆拳道’라는 무술과 그 명칭이 탄생한 때는 언제인가? 우리나라 사서에 여러종류의 놀이와 무술의 이름들이 등장하는데 태권도라는 무술의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역사는 얼마되지 않는다. 먼저 태권도를 논하는데서 없어서는 아니될 인물이 있다. 이 태권도라는 명칭을 작명한 최홍희는104)  자신의 저서 ‘태권도와 나’를 통해 자신이 ‘태권도의 창시자’라고 하며, 또한 많은 추종자들은 그를 ‘태권도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태권도의 창시자라기 보다는 명칭의 작명자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가기 전에 한일동에게서 택껸과 서도를 사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비호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가 단지 일본에서 수련한 가라데에 새로운 명칭을 씌우면서 그간 그가 연구개발한 기술들을 첨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5대 문파를 비롯하여 많은 타관他館, 즉 조금씩 다른 형태의 무술(특히 당수도, 공수도, 화랑도, 택껸 등)들이 연합하여 결성된 대한태수도협회의 회장이 된 후 그 협회의 명칭도 자신이 작명한 태권도로 개명하였다. 재론하건데 그는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군인들에게 무술을 수련시키면서 국방력을 키웠고, 그 후 외교관으로써 우리의 태권도를 많은 나라로 전파 보급하였으며, ITF(International Taekwondo Federation, 국제태권도 연맹, 1966년 3월 22일 구 조선호텔에서 결성)를 결성하여 더욱 큰 규모로 태권도를 보급 발전시켰다. 하지만 1972년 캐나다로 망명한 후 보인 그의 반정부와 친북활동은 태권도에서의 그의 평가가 왜곡되거나 절하되어 있다. 그러니까 아직도 그의 평가는 정립되어 있지 않다. 그의 이런 ‘일탈행동’이 과연 그의 사상이나 이념 등에 따른 신념이었는가, 아니면 그냥 개인적으로 처우에 대한 불만으로 인하여 감상주의에 젖었거나 또는 권력지향형의 본심이 발로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어느 쪽이던 그가 남긴 족적과 영향으로 볼 때 후세나 사가들의 좋은 평가를 받기는 힘들 것이다. 객관적으로 볼때 그가 태권도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작명에 심혈을 기울인 선구자였으며 결과적으로 그가 작명한 ‘태권도’라는 무술은 세계만방에서 기세를 떨치면서 밟는(跆) 태권도가 아닌 차는(Kicking) 태권도로써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는 최홍희가 어떤 계기로 왜, 당시 자신이 수련하던 가라데를 우리의 무술로 바꾸면서 태권도라는 이름을 탄생시켰는지 살펴보자. 그 동기와 배경 그리고 추진한 내역을 최홍희의 저서 ‘태권도와 나’와 ‘태권도 교서’ 그리고 김용옥의 저서 ‘태권도 철학의 구성원리’105), 강원식과 이경명의 공저 ‘태권도 현대사’ 등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고로 이 책들과 기타의 문헌을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재구성 해본다.
먼저 결론 부터 말하면 1955년 4월 11일 이전에는 ‘태권도’라는 말은 인류 역사상에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 어떤 무술도 ‘태권도’라고 불리지 않았으며 최홍희를 제외한 아무도 구상하지 않았다. 

2010년, 28년만에 찾은 모국 방문에서 여러 언론 및 태권도 관계지에 인터뷰한 남태희에 의하면 자신이 옥편을 들고 최홍희를 도와서 ‘발足’과 연관이 있는 단 한자一字 ‘태跆’자를 찾았으며 권拳자는 당수, 공수의 수手를 벗어나 조금 더 무게감 있게 갓머리가 있는 주먹 권拳자를 조합해서 ‘태권’이라 명명하고 무도의 도道자를 붙여 ‘태권도’라고 정했다고 했다. 하지만 최홍희가 사망한 뒤에 주장한 거라서 최홍희의 부관이 었던 그가 얼마나 관여하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최홍희에 의하면 남태희 부관을 불러 태껸의 태를 논의 했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흔하지 않았던 태跆자를 자신이 한학을 했기 때문에 발견하였고 ‘태’자와 함께 손수手 위에 갓머리가 있는 ‘권拳’, 즉 주먹을 상징해서 ‘태권’을 정하고, 인명人名으로 표현하자면 성姓에 해당하는 도道를 붙여 ‘태권도’라 명명하였다고 했다. 사실 발足과 관련된 ‘태’ 발음의 한자는 ‘밟을跆’ 밖에 없다. 

104) 최홍희崔泓熙는 1918년 생이다. 1937년 일본유학, 동경에서 예비학교(일년 반)를 다니고 대학(中央大)에 진학,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6년 1월 25일부 국방경비대 입대, 육군 소위로 군인의 길을 걸으며 1954년에 소장이 되었고, 제3관구사령관(1955),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1960), 제6군단장(1961) 거쳐 1962년 예편하였다. 그리고 주말레이시아 대사(1962), 대한태권도협회회장(1965, 당시는 태수도협회라고 했는데 그가 재임중 태권도협회로 개명)을 거쳐 국제태권도연맹(International Taekwondo Federation, ITF, 1966년 3월 22일)을 만들어서 총재가 되었다. 1972년 Canada로 망명(1971년8월 박정희가 자신을 연맹에서 몰아내고 박해한다고 생각함)하여 ITF을 확장하면서 친북활동을 하였다. 2002년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105) 여기에는 상당히 비판적이고 냉소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저자는 그것이 사실이며 솔직한 심정으로 기술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참고로 하였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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