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갑오경장 17-3
보스톤코리아  2012-07-02, 14:21:22 
국가 중대사의 결정에는 신중하고도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정치적으로 미약한 국왕을 도와 국사를 처리하는데 조언하는 것이 내조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고어에 처현부화소(悽賢夫禍少)라고 했다. 처가 현명하면 지애비가 화를 적게 입는다는 뜻이다.

국정이 문란 하게 된 것은 명성황후의 친정(親政)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명성황후의 권력의 그늘에서 실권을 행사한 처족 민 씨 일파와 청나라로부터의 인순고식의 전통에 안주하려는 노예근성의 소인배들 때문에 국왕의 권위가 서지 못하고 따라서 기강이 해이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황후의 정적이며 견원사이인 대원군에게 국정을 맡겨 왕실을 다스리도록 섭정 권한을 준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국왕전하께서 장년을 지나 40세의 연령으로 권좌에 엄연히 앉아 계시는데 아버지 대원군이 왜 섭정을 하겠다고 일본의 암살단에 앞장을 섰느냐 하는 것이다.

명성황후께서도 종래의 유교이념에 따른 보수주의로는 결코 문명개화를 성취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정치개혁은 어떤 식으로 해야 할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왕후께서 영국의 여류작가 이사벨라 비숍 여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근황을 하문하고, 동시에 영국의 내각제도와 여왕과의 관계, 그리고 각 대신의 권한, 특히 내무대신의 직위에 대하여 물으시고 여왕이 각 대신을 파면시키는 권한이 있느냐는 등 영국의 정치제도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였다 (조선기행 p.338 참조). 황후께서도 일본주도의 정치개혁을 한사코 반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노우에 공사가 소환되어 본국으로 돌아가자 정부가 요청도 하지 않은 고문단이 대거 파견되어 왔다. 일본의 이또정부는 1895년 5월에 조선정부의 고문으로 법무고문 세이쿄, 내각고문 이즈가에이조, 재무고문 사이토슈이찌로, 등 조선정부의 각 부처에 일본인 고문을 배차하여 정부를 완전히 장악하여 괴뢰정부를 만들어 놓았다.

일본은 이제 더 이상 믿을 나라가 못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명성황후께서는 러시아의 로바노프 왕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러시아는 당시 동만주를 관통하는 동청철도를 부설하기 전이라 조선에 대한 야심은 보이지 않았고 한편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가 일본을 강압하여 청일 강화조약으로 빼앗은 요동 반도를 중국에 다시 돌려주도록 하는 위력을 보여 러시아의 세력을 믿을 만하다고 보았던 것 같다. 어쨌든 명성황후께서는 간혹 러시아 공사 웨벨 씨를 궁중에 불러 들여 국내외 문제에 그의 의견을 들으셨던 것 같다. 이런 정황에서 일본은 명성황후가 일본을 제거하기 위해서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 드린다고 비난하면서 황후를 살해한 것이다.

명성황후 참살의 비극을 목격한 사람도 많았다. 미국인 훈련대 교관 따이 장군이 직접 목격하고 그 진상을 폭로하자 일본의 이또 내각은 당황하여 명성황후시해의 주모자 미우라 공사 이하 47명을 소환하여 지방법원에 기소했다. 황후 참살의 주모자인 오까모도 류노스께는 실토하기를 명성황후 살해의 음모는 주한 공사 미우라고로와 스기무라 서기관 그리고 자기 오까모도 3인이 공관에서 모의하여 민씨 살해를 결의하고, 거사에는 왕비의 정적인 대원군을 종용하여 입궐시키기로 하고 조선 훈련대와 일본 낭인배를 이용키로 하였으며 비밀리에 서울주재 일본수비대의 후원을 받아 경복궁에 침입하여 왕비를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일본 관보 명치 29년 10월 참조.) 그러나 일본 정부가 시켜서 한 명성황후의 암살사건인데 누가 누구에게 죄를 물을 수가 있겠는가. 민비살해의 피고인인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 이하 47명에 대한 예심(1896년 1월 2일)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면소, 소송이 기각되었다 (일본 시사신보 1896년 1월 23일자).

명성황후 암살에 직접 관계한 기꾸찌(菊池)는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조선 역사상 희유의 여걸 민비의 최후는 참말로 비참하고 처참했다. 무심한 가을 바람 속에 벌레소리는 예와 같은데 (無心秋風裡蟲聲依舊) 이 참살의 거사는... 그 하수인이 일본인인지 또는 조선인이었는지 말하는이 없으니”라고 하였다 (기꾸찌의 수기 참조). 존경과 미움, 그리고 시기와 협박을 한 몸에 받아온 명성황후는 일본공사 미우라고로와 흥성대원군의 공모로 일본의 암살단에게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후 국왕을 위협하여 김홍집과 유길준을 중심으로 하는 제 3 차 김홍집 내각을 설립하였다. 일본은 반 민씨파인 대원군을 집정으로 세우고, 친일파의 괴뢰정부를 수립하여 청나라를 대신하여 조선의 종주권을 가지겠다고 한 것이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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