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61 |
화랑세기花郞世紀, 11세 풍월주風月主 하종夏宗(2) |
보스톤코리아 2019-02-04, 10:38:25 |
화랑세기의 기록, [<하종은 갑신생이고, 무신년에 화랑이 되었다.> 11세 하종은 세종전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미실궁주이다. 당초에 법흥제法興帝와 영실공이 내정에서 축구蹴毬를 하고 있는데 옥진궁주가 졸린 눈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이르러 제帝의 손을 이끌며 “좋은 꿈을 꾸었는데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함께 하는 것이 옳습니다” 했다. 제帝가 “무슨 꿈인가?” 했다. 말하기를 “칠색조가 가슴으로 들어 왔습니다” 했다. 제帝가 웃으면서 “칠색은 섞인 것이고, 새는 여자다. 빈첩嬪妾의 조짐이다. 네 지아비와 더불어 하라” 했다. 옥진이 기뻐하지 않았다. 제帝가 말하기를 “네 지아비와 나는 일체이다. 아들을 낳으면 곧 태자로 삼고 딸을 낳으면 곧 빈嬪으로 삼을 것이다” 했다. 옥진이 이에 좋아하며 마침내 영실과 장막 안으로 들어가 사랑을 이루었다. 과연 딸을 낳았다. 옥진은 제帝를 신이라고 여겨 묘도妙道라 이름 했다. 묘도가 자라자 법흥제가 약속한대로 사랑幸을 했다. 그런데 작고 좁아 맞을 수 없었고, 또 제帝의 양기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묘도는 저녁이 되면 괴로워했다. 제帝가 자주 사랑幸하지 않았다.] 하종이 태어난 갑신년은 564년이다. 그리고 그가 풍월주에 취임한 무신년은 588년으로 24세 무렵이었다. 하종의 출생년도와 풍월주의 위位를 통하여 화랑도의 설치 연도가 576년이 아닌 540년으로 재확인해보는 기회가 된다. 화랑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하종의 어머니 미실과 5세 풍월주 사다함은 연인사이였는데, 562년 대가야 정벌 당시 사다함이 이사부 휘하의 귀당별장으로 참전하였다. 그 당시 사다함은 15,6세였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와 보니 이미 미실은 세종의 부인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사다함은 사우死友 무관랑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처로워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곧 따라 죽었다. 죽은 사다함은 이듬해 미실의 꿈에 나타나서 “우리는 부부의 연을 맺고 태어났기에 너의 몸을 빌어 아들을 낳겠다” 말을 하였다. 그리고 미실은 곧 잉태하였고, 564년 태어난 아들이 하종이다. 그리고 그는 진흥왕의 생존 시 화랑이 되었다. 진흥왕의 사망년도는 576이고, 삼국사기에는 화랑의 설치년도가 576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진흥왕의 즉위년인540년이 설득력을 더 얻는다. 위에 등장하는 옥진의 칠색조 태몽은 법흥왕의 예언대로 여자아이를 낳았고, 그가 미실의 어머니인 묘도이다. 법흥왕은 약속대로 묘도를 후궁이 삼았는데 ‘작고 좁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마도 어린나이에 후궁으로 들인 것으로 추측된다. 많은 후궁을 들였던 법흥왕은 정비 보도부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삼국유사와 화랑세기에 따르면 보도는 소지왕과 선혜부인의 딸이다. 즉 김씨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박씨로 나온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법흥왕과 함께 영흥사라는 절을 짓고 출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에는 법흥왕의 명에 따라 보도만 비구니가 되었다. 상이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다소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500년 말엽 소지왕에서 석연치 않게 방계족인 지증왕(법흥왕의 아버지)으로 왕위가 이어진 점을 주목해보면(기록되어 전하지는 않지만 정변이 있었다는 심증을 지울 수 없다), 이미 당시 소지왕의 딸인 보도공주와 결혼하고 있었던 김원종(후에 법흥왕)은 부인을 의도적으로 멀리 하였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제21대 소지왕과 제22대 지증왕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들은 모두 제17대 내물왕의 증손자들이다. 내물왕(정비 휴례부인 사이에서)은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19대 눌지왕, 차남은 복호, 삼남 미사흔이 그들이다. 눌지왕의 아들이 20대 자비왕이고, 자비왕의 아들이 21대 소지왕이다. 한편, 내물왕의 차남 복호의 아들이 습보이고, 습보갈문왕의 아들이 22대 지증왕이다. 그래서 소지왕과 지증왕은 부계로는 6촌간이다. 그런데 눌지왕의 딸이며 자비왕의 여동생인 조생부인이 습보와 부부가 되었기에, 그들은 외내종으로 사촌간이다. 또한 소지왕의 딸 보도와 지증왕의 아들 원종이 부부가 되었기에 그들은 사돈간이기도 하다. 좀 얼키고 설킨 가족관계이지만 신라의 골품은 그렇게 이어졌다. 한편 소지왕은 정비 선혜부인 사이에서 아들이 없었다. 선혜부인은 승려 묘심과 사통하여, 묘심은 주살되었고 선혜는 폐위되었다(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사금갑 사건’ 의 주인공들이 그들일 것으로 추측한다). 소지왕은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그가 후궁 벽화와 낳은 김산종이며, 500년 당시에는 아주 어린 아이였다. 나이가 어리고 적자가 아니었기에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났다고 한다면, 차기는 사위인 김원종이 승계함이 자연스러운데 지증에게로 갔다. 500년 말에 제22대 지증왕이 즉위할때 그의 나이 무려 63,4세였다. 물론 그는 514년 까지 장수하면서 왕위에 있었지만, 그 당시 김원종(후에 법흥왕)은 40대의 장년이었다. 기록은 없지만 어떠한 연유로 왕위는 노년의 지증왕에게로 갔고, 김원종은 소지왕의 후궁 벽화와 다른 몇몇 후궁도 차지하였다. 그리고 보도를 멀리하였다가 후에는 폐위까지 하였다. 이런 정황상으로 볼때 정변이 있었을 가능성의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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