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담객설閑談客說: 익혀라. 그리고 잊어라
보스톤코리아  2015-07-20, 14:56:13 
  한창 여름이다. 고온다습이란 말이 보스톤에선 어울린다. 더우면서도 눅진하다. 화창한 날은 잦은데, 그닥 상쾌한 맛이 없다는 거다. 그래서 그런가 짙푸른 여름인데, 마음은 썩 푸르지 않다.  진한 햇빛 아래 나무 그림자가 날카로운 각을 만든다만, 그늘이 더위를 온전히 덮지 못하는 거다. 목형균 시인이다. 칠월이 한해를 꺾었다. 칠월엔 아내의 생일이 있다. 그나마 내가 즐겁다.

계절의 반이 접힌다
폭염 속으로 무성하게 피어난 잎새도 기울면
중년의 머리카락처럼
단풍들겠지
­견딜 수 없는 햇살
굵게 접힌 마음 한 자락
폭우 속으로 쓸려간다.
(목형균, 7월 중에서)

  바둑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정석을 외워라. 그리고 잊어라’. 문제는 알려진 정석만해도 3만 개가 넘는단다. 그러니 몇 년을 열공하지 않으면 다 익힐 수는 없다. 뒤이어 따르는 문장도 난감하다. 익혔으면 잊으라 했다. 자기것으로 만들었다면, 제대로 운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일 게다. 혹독한 훈련방법일 것인대, 프로바둑 기사가 되는 길은 고되고 험난한 듯 하다. 하긴 프로기사棋士가 되는 길만 어렵겠는가. 어느 분야건 프로가 되는 건 만만하지 않다. 같은 뜻일 듯 싶은데, 성철스님도 한 말씀 했던 게 기억에 남아 있다. ‘책을 불태워라.’  다 읽었으면, 거기에 매달리지 말라는 말일 게다. 익혔다면, 책에 연연하지 말라는 경구일터. 말씀은 쉬운듯 한데, 뜻은 무척 깊다. 외우고 익히는 건 어려워도 잊는 건 순식간일 수도 있다. 

  노자가 말했다.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직역을 한다면 ‘공을 이루었다면,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이다. 노자의 표현을 표절한다. 학이불거學而不居로 해야겠다. 배우고 익혔다면 그 자리에 머물지 말라고 내 나름 해석을 가져다 붙인다. (문법이 맞네 시비하지 마시라. 이건 엉터리 표절이다.) 한국의 저명한 소설가가 곤경에 처했다. 남의 문장과 소설의 한 단락을 뭉텅이로 표절했단다. 그는 여러번의 필사로 소설과 문장을 공부했다고 들었다. 그럴듯한 문장과 소설을 베껴 써가면서 훈련했다는 거다. 헌데,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했고, 날것을 상 위에 올려 놓은 모양새가 되었다. 외우기는 했다만, 잊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표절이 도둑질이라 했는데, 말은 섬짓하다.

  풍문으로 들었다. 고등학교적 이야기이다. 누구는 영어사전을 하루에 한장씩 단어를 찾아 외우고, 외운 페이지는 뜯어서 입 속에 넣어 삼켰다 했다. 사전 종이를 매일 먹어가며 장기복용했던 거다. 아주 엽기적인 이야기 일터인데, 그에게는 성스런 의식이었으리라. 영어단어를 제법 외웠을 만큼 날이 흘렀다. 몇달이 지났던 거다.  그 친구 하는 말이 걸작인데, 오직 한 단어만 떠오르라더라. ‘goat’ (염소).  

  글 중에서 작가가 도용했다는 표현이 그럴듯 하다. ‘기쁨을 아는 몸’이란다. 익혀서 내 것을 만들어 한없이 기쁠 적에 몸도 마음처럼 가벼울 게다. 그도 이제는 잊을 건 잊어야 하고, 제 것이 아닌 것은 털어 내야 한다.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을 아내의 생일은 익혀야 한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내영혼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베푸신 모든 은덕 잊지마라 (시편 103:2, 공동번역)


김화옥  (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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