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담객설閑談客說: 종이지도를 펴시라
보스톤코리아  2015-06-15, 12:00:39 
  비가 오셨다. 봄비인데, 봄 가뭄 끝에 내린 단비였다. 덕분에 해갈되었고, 날리던 꽃가루는 잦아들었다. 기온이 떨어졌는데, 풀빛이 짙어졌다. 잔디가 푸르러 간다. 감기 기운에 몸이 으슬거렸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이수복, 봄비 중에서)

‘역시 배운 사람이 낫군. 지도 한장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 오다니.’  뒷자리에 앉아 계시던 장인이 감탄어린 찬사를 보냈다. 서부에 살 적에 내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그랜드캐년을 찾아 가는 중이었다.  졸지에 아주 똑똑한 사위 되었다. 

  기억하시는가. 천관우 선생이 썼고,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기행문 ‘그랜드캐년’이다. 두어 문장만 따왔다. ‘K 형, 황막荒漠의 미개경未開境  ‘애리조나’에 와서 이처럼 조화의 무궁을 소름끼치도록 느껴보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랜드캐니언’의 그 웅혼雄渾 괴괴한 절승絶勝 을 그 한 모퉁이나마 전해 드리려고 붓을 들고 보니, 필력이 둔하고 약한 것이 부끄러워집니다.’ 그의 기행문 문장은 그랜드캐년 만큼 웅혼하다. 희미한 작은 흑백사진이 교과서에 실렸는데, 가르치는 선생님도 그랜드캐년을 구경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저 머리 속에서 웅장한 그랜드캐년을 상상했더랬다. 이십여년이 흘러 멀리 봤던 그랜드캐년은 내 입에서 단 한마디. ‘아~아’ 라고 했을 적에도 모든 걸 담아낼 수 없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너무 광활했고, 내 눈은 너무 작아 넓고 깊은 붉은 계곡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강 계곡은 깊어 볼 수 없었고, 먼 절승은 너무도 멀어 아득했기 때문이다. 글로 다 표현할 수 없고, 사진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절경은 그랜드캐년뿐일 게다. 

  미국에 처음 와서 지도책을 구입했다. 그랜드캐년을 종이지도에서 찾아냈다. 엘로우스톤 또한 찾아봤다. 심심할 틈이 없을 때였는데도, 취미삼아 지도를 펴고 여행을 하곤 했던 거다.  지도 속 여행은 얼마나 달콤했던지.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엎드려 들여다보곤 했다. 여기가 보스톤, 뭐, 뉴욕이 거기 있었어?  미국의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를 종횡무진, 종이지도 여행을 즐겼던 거다. 이젠 그런 지도책 위에 먼지만 쌓인다. 머리와 생각만으로 여행을 간다. 여행은 길을 떠나야 하는데, 그랜드캐년 여행도 마음 속으로만 길을 나서는 거다. 

  한마디 덧붙인다. 내게 인간의 최고 발명품을 꼽으라 한다면 내비게이터다. 하지만 그런 내비게이터에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구글맵만 쳐다보고 오고 가느라, 어떻게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지시대로 운전하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해 있더란 말이다. 한 번 가본 길이니 다음에 다시 찾아가라 한다면, 내비게이터 없이는 찾아갈 수 없다. 게다가 내비게이터를 이용하면 동서남북은 물론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도대체 어느 도시 옆에 어느 도시가 붙어있는지 윤곽을 잡을 수 없다는 거다. 내비게이터가 작동되지 않는다면, 거리의 미아가 될 게 뻔하다. 

  여행을 준비하는 분들은 잘 다녀오시라. 종이지도를  한 번 쯤 펴서 쳐다보고 공부하고 가시라. 큰 그림이  보일 게다. 아참, 내비게이터는 따로 챙길 필요 없겠다. 스마트폰에 앱으로 있다. 

‘푯말을 세워두어라. 갔던 길을 잊지 않도록 길목마다 표를 해두어라.’  (예레미아 31:21, 공동번역)


김화옥  (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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