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85 |
보스톤코리아 2015-06-15, 11:54:38 |
1972년 최홍희는 박정희와의 갈등과 태권도계에서 설자리를 잃고 나서 캐나다로 이주/망명하였다. 그리고 유신체제 비난과 반정부 언행을 일삼으면서 우리나라에서는 군軍과 태권도계를 중심으로 그에 관한 공개적인 담소는 금기시 되었다. 특히 1980년을 전후하여 사상과 이념적으로 전향하여 김일성을 만남과 그 후 의도적으로 덮혀진 그의 과거 행적은 그의 많은 지인들과 관계자들을 어리둥절하고 난처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최홍희가 창설하여 총재직을 맡았던 국제태권도연맹(ITF)은 어느날 갑자기 우리나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정부기관(정보기관)으로 부터 철저하게 감시받는 단체로서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 후 25년이 지난 1997년 인사이드월드(시사 주간지, 발행인 고 손충무)에 기사화 되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일반인들에게는 인터넷이 확산된 2000년 이후부터이다. 1966년에 창설하여 평생 ITF의 총재를 역임한 최홍희는 1972년 캐나다로 이주한 후 캐나다 국적으로 살다가 2002년 6월 15일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혁명열사능에 안장되어 있다. 그는 죽기 전에 우리나라 국내에도 자신의 태권도(ITF)를 재보급하였으며 회원의 가입 허용을 받았다. 그 와중에서 최홍희가 사망하면서 ITF는 분열되었다. 그의 아들 최중화 총재가 이끄는 ITF, 북한 IOC위원인 장웅 총재의 ITF, 베트남계 캐나다인인 트란콴 총재의 ITF 등으로 3등분 되었다. 즉 최홍희가 사망한 후 ITF는 아들 최중화를 아르젠티나에서 열린 총회(2002년 11월)에서 새 총재로 선출했다(2001년에 최중화를 새 총재로 세웠고 이 회의에서는 형식적인 확정 절차로 보인다, 하지만 장웅은 2002년 6월 평양에서 최홍희가 사망하면서 추모식에 모인 몇몇 인사들과 세를 규합하여 ITF의 총재가 되면서 이원화가 되었다. 또한 상대적으로 미약하지만, 역시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트란콴의 ITF가 분열되면서 삼분화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최중화는 자칭 ITF의 적자임을 내세웠지만 모든 회원들이 그의 리더쉽에 따르지 않고 분열된 것이다. 그는 선친의 사업을 이어받아 2004년 국내(대전)에서 48개국의 ITF회원국 2,600여명이 참가하는 대회를 성공리에 개최하면서 ITF의 건재를 입증하였다.123) 그리고 WTF와 ITF의 통합을 거론하면서 자신의 지분을 국제 태권도계에서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2008년 ITF의 본부를 우리나라로 이전하기로 하였으며 캐나다 국적의 그는 그해 2008년 9월 23일 전향 귀국하였다. 당시의 ITF에 가입 회원국을 120여개 국이었으며 4,000만명의 회원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편 박종수 부총재가 장웅의 ITF에서 최중화의 ITF로 2011년 이적하였다. 박종수에 의하면 최홍희 장군은 “김운용을 견제해 ITF를 지켜 태권도를 하나로 만든는데 도움이 된 인물이 장웅이다”라고 했기에 장웅이 총재가 되어 ITF를 이끌어야 된다고 생각했으며 장웅과 뜻을 같이했다고 했다. 북한의 장웅이 총재가 되어 활동하는 ITF는 노동당 통일선전부가 장악하여 그 세를 세계적으로 확장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박종수의 이적으로 국제사회의 ITF는 북한을 제외하고 다시 하나로 통합되는 추세로 가고 있다. 그러나 최홍희가 없는 ITF는 선장없는 배가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것처럼 세계 태권도계에 투영되고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3,000만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주장이며 객관적인 통계는 확실하지 않다. 최홍희의 부재 뿐만이 아니라 올림픽을 비롯하여 세계 태권도의 모든 영역을 공인하에(모든 국제스포츠 기구들로 부터) 장악하여 운용하는 ‘세계태권도연맹(WTF)’의 활동에 상대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ITF는 그 창시자와 함께 이름만 남기고 살아질 것인가? 최홍희는 말년에 위암으로 투병했으며 상대적으로 의술이 더 좋은 미국이나 캐나다가 아닌 북한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와지면서 조국(Korea)에 묻히고 싶다면서 남한과 북한에 의사를 타진하였다. 남한으로 부터는 시기상조라는 답변을 들었고 북한은 그의 의사를 수용하였다. 그는 평생을 목숨과 같이 사랑한 태권도와 관련한 모든 ‘족적’을 북한에 기부하였고, 2002년 6월 15일 평양에서 사망하여 혁명열사능에 안장되어 있다. 그가 작명한 ‘태권도跆拳道’, 우리나라 역사 속에는 수 많은 무예가 나타난다. 각기 다른 무예로 또는 같은 무예가 시간적이나 공간적인 변화에 따라 여러가지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물론 그중에는 지금까지 전수되어 수련되는 무예도 있지만 시간적인 변천에 의해 명멸하는 이름들, 과연 ‘태권도’란 명칭은 얼마나 오래갈까? 123) 이 대회를 비롯하여 2008년 최중화의 한국 방문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오창진이다. 그는 ITF 한국 지부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최중화를 중심으로 ITF가 한국에 알려지는데 주도적인 활동을 했다. 나중에는 최중화가 그를 업무상 횡령 및 사기로 검찰에 고소를 하기도 했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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