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2. 원주민과 유럽인과의 첫 만남 (2)
보스톤코리아  2015-05-11, 11:40:42 
발견의 영웅인가? 날강도인가?  (계속)
콜럼버스 휘하의 선원 한 명이 1492년 10월 12일 긴 대서양 항해 끝에 바하마제도의 한 섬을 발견하였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항해일지 등의 자료에 근거해서 아마도 산살바도르 섬(San Salvador)이 첫 상륙 지점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콜럼버스 일행은 바하마제도를 떠나 쿠바에 잠간 들렀다가 히스파뇰라섬 (Hispagnola; 지금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가 있는 섬)에 상륙하여 본격적으로 탐험을 시작했다. 콜럼버스는 그가 도착한 육지가 인도의 동쪽 끝 카타이(당시 유럽인들이 중국을 지칭하는 또 다른 말) 아니면 지팡구(당시 일본을 부르던 말) 쯤으로 착각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그곳이 아메리카 대륙이 아니라 유라시아대륙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인도제도, 인디오, 또는 인디언이라는 말이 쓰이게 된 것이다. 

훗날 이탈리아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i)가 서인도제도와 브라질을 탐험한 뒤 이 대륙은 유라시아 대륙과는 전혀 관계없는 별개의 대륙임을 주장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의 세계지도와 매우 흡사한 지도(Universalis Cosmographia, the Waldseemüller wall map)가 1507년에 처음 발행되었다. 이 지도에서 아메리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는데 베스푸치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보고 있다.

대서양 직항로 개척을 위한 벤처사업
오래전부터 동서양간에는 이른바 실크로드를 통해 문물교류가 활발하였는데, 15세기 셀죽 터키가 소아시아와 인근지역을 장악하면서 종래의 무역로가 막히거나 아니면 거래가 이루어지더라도 높은 통과세등이 붙어 사실상 교역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사정이 악화되었다. 비단과 향신료 등 유럽인들의 필수품이 되다시피 한 물품들의 새로운 원활한 유통경로를 찾기 위하여 육지길 대신 바닷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의 엔리케(Henrique) 왕자가 주도하여 포르투갈이 제일 먼저 대항해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유럽의 중심이 지중해로부터 대서양으로 옮겨오기 시작한 것이다. 1488년에 바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의 최남단 희망봉을 발견하게 되고 바스코 다가마는 1497년에 인도양을 가로질러 인도에 까지 도착하여 동방과의 무역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는 등 동서교역시장을 선점해 나갔다. 

당시의 영국이나 프랑스의 해군력은 포르투갈에 크게 뒤지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바로 이웃인 스페인은 700년간 스페인을 지배해온 북아프리카 출신의 무어인들을 쫓아내기 위한 이른바 국토회복전쟁에 재정이 많이 지출되었기 때문에 재정능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한편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곧바로 인도로 가겠다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모험적인 계획을 세우고 경제적 스폰서를 구하기 위하여 포르투갈은 물론이고 이밖에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를 찾아다녔지만 후원자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스페인은 1492년 1월에 그라나다까지 되찾으면서 무어인들을 북아프리카도 쫓아내고 스페인의 통일을 완성하고 대서양 항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데, 이미 크게 앞서 나가고 있는 포르투갈을 단번에 따라잡기 위해서는 모험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스페인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셈이다. 이 역사적인 벤처사업에 담긴 계약내용에는, 콜럼버스는 해군제독의 계급을 달고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하며 건설될 새 식민지의 총독이 되고 스페인이 들여오는 경제적 부의 10%를 콜럼버스가 갖도록 돼있었다. 

콜럼버스의 악행은 첫 항해 때부터 시작되었다. 히스파뇰라섬의 원주민인 아라와크족(Arawak) 한 명을 매우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죽였으며 귀국길에는 여러 명의 원주민을 스페인으로 잡아와 노예로 팔아넘겼다. 1차 항해를 끝내고 스페인으로 돌아온 콜럼버스는 그가 도착한 땅에는 금은 물론이고 그밖에 진귀한 물건들이 넘쳐난다는 식으로 크게 과장된 보고를 하여 국가적 영웅으로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스페인 왕실은 더 그게 지원하여 2차 항해 시에는 17척의 배에 1200 명의 대규모 인원을 파견하여 식민지건설을 시작하면서 콜럼버스와 그의 부하들의 인디언에 대한 만행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라스 카사스 사제도 이때에 동행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신영의 세상 스케치 497회 2015.05.11
내가 비행기를 몇 번 더 타고 미국에 갈 수 있겠니!!??
한담객설閑談客說: 대전발 영시오십분 2015.05.11
  올 봄은 늦게 오더니 일찍 가려나 보다. 꽃 몇송이 보이는 듯 싶더니, 금새 날이 덥다. 뭐 그렇다고 불평하는 건 아니다. 노루 꼬리 마냥 짧다만,..
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2. 원주민과 유럽인과의 첫 만남 (2) 2015.05.11
독자기고
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80 2015.05.11
최홍희와 태권도(2)
집착하는 ‘나’, ‘나’ 때문일까? ‘너’ 때문일까? (1) -좋은 습관은 행복으로 가는 직행선 VIII- 2015.05.11
양미아의 심리치료 현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