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침략정책과 조선총독의 고려대장경 간행 (1)
보스톤코리아  2014-06-09, 11:51:04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의 각판은 세계에 자랑할만한 귀중한 문화재이다.
일본은 한일합방후(1910년) 합천해인사에 있는 고려대장경의 각판을 조사하여 두번에걸쳐 인출했다.

 첫번째는 초대총독 데라우찌 마사다게(寺內正毅)때이고 두번째는 제7대 미나미지로 (南次郞) 총독 때이다.

이두 총독의 고려대장경의 인행(印行)은 불교신앙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일본의 국력 신장과 식민지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이 없지 않았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이 어떠했는지를 밝히는 일은 총독부 시대의 역사연구에 있어서의 핵심이 되겠다. 

그런데 이 시기의 연구가 아직 미비한 것 같다. 이제 데라우찌 총독의 고려대장경 인출을 설명하기 전에 그가 조선총독으로서 정치를 어떻게 했는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은 노일 전쟁 후인 1905년 11월에 제2차 한일협약을 일방적으로 체결하고  일본정부를 대표하는 통감부를 서울에 두고 한국의 정치를 감리하게 했다.

초대 통감에는 추밀원 의장인 원로정치에 이도히로부미(伊藤博文 이등박문 )가 임명되었다. 초대 통감으로 1906년 1월 한국에 온 이도는 일본인 헌병과 경찰을 데려다가 한국의 치안을 담당케 하고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고립무원하게 만들었다. 그는 통감정책에 반대하는 한국사람을 가차없이 처단하기 위하여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즉시 처형하는 <범죄즉결령>을 공포하여 강압정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일본은 한국에 식민지정치를 시행하기 위하여 1909년 7월 6일 각의에서 “한국을 병탄한 다음 헌병과 경찰을 증파하여 치안을 확고히 하고 일본인 관료를 등용하여 한국의 행정권을 장악한 다음 한국의 군대를 해산시킬 것을 결의했던 것이다.”

일본의 한국을 병탄하려는 계획은 노일전쟁중에 결정해 놓은 사안이었다. 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던 자가 바로 이도히로부미였다. 그 이도가 1909년 10월 26일 만주의 하르빈 역두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었다. 이도가 한일합방을 반대했다고 말하나 가쯔라 내각은 1909년 7월 이도 통감의 동의를 얻어서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도는 가쯔라 내각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서 한국에 강압정치를 펴 온 장본인이다. 

한국과 만주를 침략하는데 앞장섰던 주동자가 바로 이도히로부미였다. 그는 한국사람이 아니면 중국인에게 죽어야 할 사람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이도통감 사살은 그의 애국적 의거이기도 하지만 악의 제국 일본을 응징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통쾌했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물론 중국인들도 쌍수를 들고 환호를 올렸던 것이다. 이도통감이 죽어서 공석이 된 통감자리에는 일본의 육군대신 데라우찌 마사다게가 임명되었다.  

제2대 통감으로 서울에 온 데라우찌는 제2차 가쯔라 내각의 식민지 정을 그대로 실현하기 위해서 온 군인이었다. 일본정부는 한국에 식민지 통치를 시행하기 위하여 헌법을 정하지 않고 총독을 두어 정무전반을 집행케 했다. 그에 따라 데라우찌가 1919년 8월 16일 한국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한일합방에 각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제국회의(帝國會議)에서 한일합방조약을 가결하여 천왕의 제가를 받은 다음 그것을 한국에 보내서 한국정부로 하여금 조인하게 했다. 그리고 한일합방을 국내외에 선언한 다음 한국의 국호를 조선이라 개칭하고 1910년 9월 12일부로 한국에 총독부를 설치했다. 

데라우찌 통감이 10월 1일자로 조선총독에 임명됐었다. 한국 합병을 주도한 자는 제2차 가쯔라 내각의 수상 가쯔라다로와 외무대신 고무라주다로 그리고 육군대신 데라우찌 마사다게 등이다. 이들은 노일전쟁을 주동한 야마가다 아리도모 (山縣有朋)군벌의 무단파들이었다. 데라우찌가 통감으로서 조선총독이 된 것은 조슈의 군벌의 일파로 기정의 사실이었다.  어쨌든 한국은 이후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억압과 착취를 당하게 된다.

초대 조선총독이 된 데라우찌는 부임하자마자 곧 1911년 4월 17일부로 조선토지수용령 (朝鮮土地收容令)을 발표하고 조선사람의 토지를 강제로 수탈하기 시작했다.

1908년에  설립된 동양척식회사 (東洋拓殖會社)가 조선토지의 수탈을 단행한 일본의 국책회사이다. 동척은 한국사람의 토지를 수탈하여 한국의 농업경제를 완전히 몰락하게 만들었다.  데라우찌는 한발 더 나아가 1911년 8월 24일에는 조선인교육령 (朝鮮人敎育令)를 공포하고 조선학생에게 황국신민교육과 일본어를 보급하는 식민지 교육을 실시케 했다. 그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조슈(長洲) 군벌의 무단파로 정치를 모르는 군인이었다.

그는 제2차 기쯔라 내각의 훈령에 따라서 한국에 식민지적 강압정치를 했다.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정치에 반대하는 반일단체를 가차없이 처단했던 것이다. 1912년 2월에 있었던 사회단체인 계몽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105인 사건이 그 한 예이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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