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2
보스톤코리아  2014-02-17, 12:07:34 
다음은 의병장 곽재우의 족적을 의병과 무예를 중심으로 따라가 본다. 먼저 조선왕조실록(광해군일기 – 중초본, 광해군9년, 1617년4월27일)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를 보면 “전 한성부 좌윤 곽재우郭再祐가 졸하였다. 곽재우는 조식曺植의 사위이고 김우옹, 정인홍 등과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성리학을 알지 못하여서 진사시에 들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에 즉시 학문을 버리고 가 힘써 농사지으면서 재물을 늘려 재산이 몇 만 금이나 되었다. 그러자 시골 사람들이 그가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의심하였으나, 곽재우는 태연스럽게 지내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왜변倭變이 일어났다고 들음에 미쳐서 곽재우는 당시 별서別墅에 있었는데, 즉시 크게 통곡하고는 스스로 별서를 불태우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재물을 모두 흩어서 악소배惡少輩 1백여 명을 모아 왜적을 토벌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먼저 의령에 있는 왜적을 치고 다음으로 포위당한 진주성을 구원하여 여러차례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로부터 이름이 드러나서 병사兵使로 발탁되었다. … 하략.”라고 되었다. 

인용된 졸기는 앞부분의 일부이다. 그는 북인이였으면서도 주류가 아니었고 의義를 위하여 정론을 주장한 관계로 사후 졸기에 마저 그를 혹평해 놓고 있다. 혹평뿐만 아니라 사실이 아닌 부분도 있으며 또한 많은 내용이 왜곡되어 있다. 사후에는 생전보다 후한 평을 내리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그가 살았던 행적은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정正과 의義를 위해서만 살았기 때문에 같은 북인들이 기록한 졸기였지만 대단히 비하된 혹평이다. 

즉 정의를 위하여 정도를 걸어온 그의 삶의 철학은 왜적이 침입했을 때 절정을 이루었다. 그는 사비를 털어서 의병들을 모집하였으며 대부분의 관리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한데 반해 그는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여 분연히 앞장서서 전장을 누볐던 것이 조금도 놀랍지 않다. 졸기에서 ‘곽재우는 조식의 사위이다.’ 는 틀린 내용이다. 

곽재우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사위가 아니고 조식의 외손녀 사위이다. 조식은 부인 조曺씨와의 사이에서 요절한 아들 조차산曺次山과 김행金行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그리고 조식은 여러명의 첩을 두었는데 그는 적손이 없으며 첩들로 부터 많이 얻은 서자의 후손들이 있다. 그리고 김행에게 시집 간 딸 역시 딸만 네명을 낳았다. 곽재우의 부인은 막내딸이며 동문수학한 친구 김우옹은 김행의 둘째 사위이다. 그래서 친구 김우옹과는 동서지간이다. 그리고 ‘성리학을 알지 못하여서 진사시에 들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 내용 역시 사실이 아니며 많이 왜곡되어 있다. 그는 일찍이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처음에 응시한 과거에는 낙방하였다. 그리고 후에 응시한 진사시에도 낙방하였다. 진사시에 낙방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리학을 몰라서 낙방한 것은 아니다. 그 후 1585년(선조18년) 과거를 보아 별시문과의 2등으로 급제하였으나, 지은 글이 임금 선조의 비위에 거슬린다고 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이 취소되었다. 

동인 김효원이 조식의 문하생이었던 관계로 조식의 문하들은 모두 동인이 되었고, 그 후 송강 정철의 사형 문제로 남인 북인으로 나누어질 때 곽재우는 북인이 되었지만 동인과 북인 내부의 정쟁이 못마땅하여 북인의 실권자였던 이산해 등과 멀리하였다. 즉 곽재우는 영창대군의 살해와 인목대비 유폐 등의 사건에서 북인들의 정책에 반론을 펴면서 정도를 주장했다. 과거 합격이 취소된 후 그는 정계를 떠나 낙향하였다. 스스로 호를 망우忘憂라고 지어서 세상사의 근심과 걱정을 저버리고 초가집 몇 칸을 낙동강 하류에 짓고 은거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숨어서 살기만 한 것이 아니고 농사를 지으면서 근검절약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는 학문과 무예에만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농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이 증명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는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비웃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의연하게 큰 뜻을 품고 재산을 모으면서 앞을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1592년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많은 관리들은 가족들만 데리고 피신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관군들은 싸움다운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도성이 적의 손에 떨어지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곽재우는 사재私財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여 관군을 대신해서 싸웠다. 그는 불혹을 넘긴 나이에 붉은 비단으로 군복을 만들어 입고 스스로 ‘홍의장군’이라 부르며 백마를 타고 전투에 임하면서 적군과 아군 장졸들에게도 위엄을 보였다. 그의 전술은 다양했다. 때로는 단기필마로 용감하게 적진으로 들어가 왜적의 목을 따기도 하였고, 위장술 및 유격전 등 다양한 전술로 특유의 대담성과 용맹성은 과감히 발휘하였다. 그러함에 처음에는 소수의 의병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나중에는 2,000여명이 넘게 휘하로 몰려들었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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