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갑오경장 15 : 시모노세키 조약과 조선독립의 승인-2
보스톤코리아  2012-02-20, 13:33:57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의 몰락으로 철의 장막이 내렸다. 문화혁명으로 공산주의를 확대하려던 죽의 장막 중화인민공화국도 결국 개방하고 말았다. 개방하지 않고는 더 이상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

얘기를 하다 보니 그만 딴 데로 많이 흐른 것 같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자. 1895년 3월 20일부터 일본의 시모노세키(하관, 下關)에서 미국 대통령의 주선으로 청일양국이 전쟁을 종결하는 강화회담이 열렸다.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일본편이다. 회담에 앞서 주일 미국 공사 에드윈씨가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오 무네미쓰를 찾아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면 유럽 여러나라의 반응이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갈지 모른다면서, 미국의 클리브랜드 대통령도 특별한 호의를 가지고 강화회담을 알선할 것이라며 강화를 적극 권했다는 것이다.

강화회담에는 청나라를 대표하여 북양대신 이홍장(1823-1901)이 나왔고, 일본의 전권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홍장 전권대신은 72세의 노인으로 아들 이경국을 데리고 왔으며 이토 히로부미(1841-1909)총리는 무쓰오 무네미쓰 대신을 대동했다.

청나라의 전권 이홍장은 전쟁 전부터 조선의 내정문제를 가지고 일본과 전쟁을 하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게다가 노인인 이홍장은 어느 날 회의를 마치고 여관으로 돌아 갈 때, 고야마 로구노스케 (小山六之助)라는 일본인 흉한의 육혈포 총격을 맞은 불상사를 당했다. 물론 일본은 국제회담 석상에서 큰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고, 이에 당황하여 이홍장 전권대사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게 되었다. 일본은 총상을 입은 이홍장에게 강압적으로 회담을 밀어붙였으니 그 회담이 정상적이며 공평하였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회담의 결과가 혹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갈지도 몰라 불안한 일본은 서둘러 회담을 진행하여 1985년 4월 17일에 조약을 체결하였다.

강화조약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의 완전 독립의 승인
2) 청나라는 요동반도, 대만, 그리고 펑후열도를 일본에 영구 할양
3) 청나라는 전쟁배상금 2억냥을 일본에 지불한다.
조약체결 후 일본이 청나라에 대하여 전쟁배상을 과다하게 요구하였다는 비난이 높았다. 또한 러시아와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세 나라가 요동반도의 할양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내고(1895년 4월 23일) 일본에 정식으로 항의하였다. 일본은 이에 굴복하여 요동반도를 중국에 다시 돌려주었다. 일본은 이 굴욕적 사실을 3국 간섭이라고 한다.

이 조약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점은 제 1항 “조선의 완전독립의 승인” 그 것이다. 그러면 조선은 이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완전 독립국가로서 새로운 역사시대를 개척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인가? 그러나 조선은 주위 강대국의 압력으로 독립국가의 실효를 거두기가 이미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면 오늘의 한반도의 실정은 어떠한가? 잠시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일본의 “노다 수상이 북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201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기간을 택해서, 중국을 방문했다. 그런데 6자 회담도 아닌 이 시점에 왜 새삼스럽게 중.일 양국영수가 회담을 가지려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12월 1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을 통고하자, 중국은 북한의 후견자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이제 중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가 명백해진 것 같다. 그렇다면 북한은 중국의 보호국이라는 말이 아닌가? 강성대국을 지향한다는 북한은 “대외적으로 주변 강대국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과 주체성을 유지한다”라고 선언한 그 주체사상은 어떻게 하고 이제 중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참으로 모를 일이다.

그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중.일 양국 영수의 한반도에 대한 표현이다.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과 일본의 노다 수상은 영수회담에서 합의 하기를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이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전한다. 그러면 그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라고 한, 그 역사적 사실은 어느 때의 역사적 사실을 두고 말한 것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중국이 한반도를 침공한 것은 그들이 이적(夷狄)이라고 칭한 요, 금, 원, 청 등 정복왕조였으며, 반면 한족정통의 당, 송, 명 시대는 한중관계가 매우 우호적이었다. 특히 한국고대의 통일 신라와 발해의 남부조 시대는 비교적 평화가 지속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616년 만주에서 일어난 말갈족의 별종인 여진족이 1644년 명나라를 정복하고 청나라를 세워 중국천하를 지배하였다. 조선은 이 청나라의 위력에 눌려 대국으로 받들기는 했으나 오랑캐라고 하여, 숭명배청(崇明排淸)사상이 가시지가 않았다.

그런데 청나라는 임오군란(1882년) 후 조선의 내정을 감시하여 오다가 1884년 갑신정변 후로는 조선을 아주 속방시하여 독립국가로서의 외교활동을 막았다. 이후로 청.일양국은 조선에서의 이권을 놓고 권력 다툼을 계속하다가,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를 당하고, 조선의 완전 독립을 승인한 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혹 중국은 한국고대 국가인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조시대를 연상하고, 노다 수상은 중국과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툰 1894년의 청일전쟁을 생각하는 동상이몽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없지 않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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