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23) |
보스톤코리아 2024-04-08, 12:45:47 |
561년 무렵, 미실은 진흥왕(재위 540년 ~ 576년)의 후궁으로 들어가 왕후에 버금가는 전주殿主/또는 새주璽主라는 작위로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자 미실의 동생 미생도 왕의 부름을 받아 입궁하여 또래의 동륜태자와 금륜태자(572년 동륜이 죽은 후 태자로 책봉되었다) 등과 어울려 친구같이 지냈다. 그들은 다 함께 토함(사다함의 형)의 제자가 되어 글을 배우고 무도를 연마하였다. 한편 미생은 얼굴이 아름답고 아양을 잘 부려 태자들이 좋아하였고, 또한 만덕萬德(계고階古, 법지法知와 함께 가야에서 투항한 음악가 우륵于勒의 제자이다. 만덕은 무용/춤의 일인자였다. 그들은 진흥왕 앞에서 많은 연주와 공연을 하였다)에게 배운 춤으로 왕을 즐겁게 하였다. 이에 왕은 공주들에게도 미생으로 부터 춤을 배우게 하였다. ‘춤사위’는 계속되었고, 그 후 어느 무렵 미생이 공주들과 사통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왕이 문초를 하려고 하자 사도왕후가 만류하였고, 동시에 미실에게 빠져 있었던 까닭에 결국 불문에 부치게 되었다. 이에 앞서 미실은 미생에게 사다함의 문하에 들어가 화랑도가 되게 하였다. 사다함이 당시 5세 풍월주로 있었다. 사다함은 미생이 비록 12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옛 연인의 부탁이라 거절할 수 없어서 그를 받아드려 화랑으로 입적入籍시켰다. 그러나 미생은 겨우 12살이었으니 스스로 말에 오를 수가 없었다. 이에 아버지 미진부(2세 풍월주를 역임하였고, 551년 거칠부 등 7명의 장군들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백제가 먼저 한강유역을 점령하자, 신라군은 죽령에서 고헌까지 10개 군郡을 점령하였다. 현재의 강원도와 함경남도 일부로 보고 있다)가 와서 퇴출시키려 하니, 미실은 연습을 하면 되지 어찌 자신의 아우를 한번에 내치냐며 항의를 하였다. 그러자 사다함은 부득이 미생을 받아 승마를 가르쳤다. 이미 오래 전부터 미실의 행실을 좋아하지 않았던 문노는 어린 미생이 낭도가 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문노는 “무릇 낭도란 자의 힘이 말에 오를 수 없고, 검을 사용할 수 없다면, 하루아침에 일을 당할 때 어디에 쓸 것인가?” 라며 질책하였다. 이에 사다함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입니다. 얼굴이 아름답고 춤을 잘 추어 또한 여러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으니,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며 양해를 구했다. 미생은 격검술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이때 부터 문노를 꺼려하며 존중하지 않았다. 그들은 579년 진지왕을 폐위할 때는 정략적으로 합세를 하였지만, 미실/미생 남매와 문노의 사이에는 늘 긴장관계가 지속되었다. 미생은12살에 화랑에 입문하여 13살에 전방화랑이 되었지만, 36살이 되어서야 풍월주가 될 수 있었다. 미생은 늘 13살, 가장 어린 나이에 전방화랑이 되었기에 풍월주도 최연소에 오르게 될 것이라며 ‘호언장담’ 하였지만(사다함은 16세에 풍월주가 되었다), 권력의 실세로 낭정을 주물렀던 미실의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문노파에 밀리면서 585년, 즉 36세가 되어서 ‘가까스로’ 풍월주가 될 수 있었다. 미실의 남편 세종이 6세 풍월주로 재임할 때, 미생을 전방화랑으로 승진시켰고, 미실이 총애했던 설화랑이 세종의 부제가 되면서 미생을 설화랑의 운상인파에 소속되게 하였다. 당시(570년 무렵 부터)는 설화랑의 운상인파와 문노의 호국선파가 경쟁적 관계로 양립하고 있었다. 그들 두 세력은 그들이(사도왕후와 미실, 세종, 노리부, 미생, 설화랑 등의 주동자와 거칠부와 문노 등의 후원자) 진지왕을 폐위하고 난 후 579년 문노가 8세 풍월주로 오를 때까지 서로가 낭정의 정통을 주장하면서 양립하였다. 즉 미생은 설화랑이 7세 풍월주로 재임시 부제로서 차기 수장이 될 수가 있었지만, 진지왕 폐위라는 거사를 일으키면서 문노가 낭정을 차지하여 8세 풍월주가 되었고, 부제는 문노의 수제자 비보랑이 임명되었으니, 비보는 자연스럽게 문노를 이어 9세 풍월주가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가장 어린 나이에 전방화랑이 되었고, 막강한 미실의 권력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지만 미생은 36살이 되어서야 풍월주가 될 수 있었다. 욕심 많은 미생이 풍월주로 재임항 당시에는 낭도들의 쟁론이 더욱 심화되어 여러 분파가 있었다. 문노파 중에서 가장 우수한 수제자들인 임종林宗, 대세大世, 수일修日 등이 중심이 되어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서 국력을 강하게 하려던 통합원류統合元流가 그 하나였다. 다음은 하종과 구륜 등 대원신통의 골骨이 중심이 된 미실일파들이다(하종의 부모는 세종과 미실이고, 구륜의 부모는 진흥왕과 사도왕후이다). 다음으로는 문노의 일파들이지만 진골정통의 골을 받고 지소태후(진흥왕의 모후)의 명을 따르면서, 가장 막강한 권력과 함께 옛 규정을 고수하는 낭도들로서 보리菩利(12세 풍월주), 숙리부叔里夫 등이 중심이었다. 또 한 무리는 이화류라고 불린 파派인데, 문노정파文弩正派와 통합원류 중에서 정숙태자(부모는 진흥왕과 숙명공주이다. 숙명은 후일 이화랑과 사랑에 빠져 야밤에 왕궁을 월담하여 멀리 떠나 살면서 원광과 보리 두 아들을 낳았다. 보리가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의 증조부이다)를 풍월주로 세우고 원광을 부제로 삼으려했던 집단이었다. 마지막으로 통합파 중의 일부가 천주공(부모는 진흥왕과 가야 이뇌왕의 딸 월화공주이다)을 풍월주로 세우고 김서현(김유신의 아버지)을 부제로 삼으려했던 가야파였다. 미생이 풍월주의 위에 있었던 시기에는 여러파가 서로 대립하면서 풍월주의 자리를 다투었다. 결국 실권을 잡고 있던 미실일파가 승리하여 미실의 아들 하종을 풍월주로 세우고, 미실은 상선과 상화들을 화합하여 열선각列仙閣을 만들어 화랑도 조직의 분열을 막는데 일조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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