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20세 풍월주風月主 예원공禮元公(4) |
보스톤코리아 2021-04-12, 11:16:31 |
17세 풍월주 김염장은 17명의 많은 첩을 데리고 있었기에 늘 그들의 청탁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630년대 초, 김예원이 김흠순 휘하에서 부제로 있을 당시) 예원은 비교적 낭정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출세’의 기회를 놓친 가야파 낭두들이 김염장을 찾아가 하소연을 하였다. 이에 염장은 겉으로는 예원의 옳바른 낭정을 칭찬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에게 자신의 서녀庶女들을 첩으로 주면서 자신의 첩들로 부터 들어오는 청탁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염장이 첩으로 삼은 17명은 모두 진골정통파, 대원신통파, 가야파 등 3파의 낭두들의 누이나 딸들이었다. 아울러 그들에게서 태어난 서녀들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염장은 그 중 몇명을 예원에게 첩으로 삼으라고 권하였다. 이미 정처가 있던 예원은 어머니의 허락없이 첩을 들일 수 없다며 사양하였다. 그러나 예원은 깊은 효심과는 다르게 벌써 서너명을 첩을 데리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그 장면, [염장공 또한 크게 기뻐하며 예원공에게 술을 억지로 권하며 “첩을 삼을 만한 어리석은 딸들이 있으니, 네가 택해 보아라” 했다. 곧 서녀 세 사람을 나아가 공에게 절하게 했다. 공은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의 어머니가 매우 엄하여 감히 스스로 택할 수 없습니다” 했다. 염장공이 칭찬하며 “이 같은 아들이 있으니 어머니는 걱정할 것이 없다” 했다. 곧 세 딸에게 명하여 손수 만든 옷을 공에게 바치고 애교를 부리게 했다. 공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거두어 돌아 왔다. 모두가 염장공의 첩인 가야파 낭두들의 소생이다. 염장공은 17명의 첩이 있었다. 진골정통파가 5명, 대원신통파가 4명, 가야파가 8명이었으며 모두 낭두郎頭들의 딸이었는데, 서로 총애를 다투어 구걸했다.] 한편 당시 신라에서 가장 뛰어난 색도와 방중술로 진흥왕과 그의 아들 동륜과 사륜(진지왕) 형제 및 손자인 진평왕까지 3대의 왕들을 색공한 미실, 그녀는 왕뿐만 아니라 여러명의 풍월주들도 정인으로 두고 있었다. 진흥왕이 미실을 총애하기전 그녀는 이미 세종의 아내였다. 세종은 진흥왕의 이부동모 동생이다. 세종은 진흥왕이 미실을 후궁으로 데리고 있는 동안 변방으로 돌며 국토를 확장하고 국경을 수비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미실은 진흥왕과 함께 반야般若공주와 난야蘭若공주 그리고 수종전군壽宗殿君을 낳았다. 후일 난야공주는 진평왕의 후궁이 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는데 그가 우야雨若공주이다. 이 우야공주가 예원공의 부인이 되었다. 이는 예원의 어머니 만룡과 우야의 어머니 난야의 사이가 좋았기에 그들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아울러 예원이 이성에 눈을 뜰 무렵 우야의 아름다움에 빠져 ‘그들의 사랑이 마치 아교나 옻으로 붙여 놓은 것 같다(원문에는 이상화여칠而相和如漆 로 기록되어 있다)’ 고 하였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여칠如漆’ 은 ‘여교사칠如膠似漆’ 의 준말로 ‘사랑이 너무 깊어 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을 말하는데 사마천의 사기에서 유래한 고사성어이다.330) 330) 원래는 사랑이 깊은 남녀의 사이를 표현한 말은 아니었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도저히 뗄 수 없는 남녀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되었다. 양효왕梁孝王 유무劉武는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전한 또는 서한)의 제후국 양나라 왕으로, 유방의 4남인 제5대 문제文帝 유항의 차남이다. 유무의 친형 유계劉啓가 제6대 경제景帝로 즉위한 뒤 ‘오초칠국의 난吳楚七國亂’ 이 일어났을 때 유무는 총지휘관/태위 주아부를 보좌하여 반란군 진압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에 유무가 천자의 깃발을 상으로 받자 그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고 천하의 무부武夫와 문재文才들이 그의 휘하로 찾아왔다. 제齊나라 출신의 추양鄒陽도 그 중 한명이었다. 그의 글재주는 따를 자가 없었다. 추양은 겸손을 모르는 인물(사마천의 평) 이라 그의 재능을 시기하는 무리들에 의해 모함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에 그는 ‘옥중상양왕서獄中上梁王書’ 을 올려 무고를 벗었다. 이 왕에게 올리는 글 가운데 ‘교칠膠漆, 즉 여교사칠如膠似漆’이 등장한다. “感於心 合於行 親於膠漆 昆弟不能離 豈惑於衆口哉? (감어심 합어행 친어교칠 곤제불능리 기혹어중구재?, 마음이 통하고 행동이 일치하며, 친함이 아교와 옻칠같은 형제는 서로 떨어질 수 없으니, 많은 이가 무고한들 어찌 미혹되겠습니까?)” 오초7국의 난은 기원전 154년 전한의 제후국인 오나라 왕 유비가 주동이 되어 조, 교서, 초, 교동, 치천, 제남 여섯 나라와 함께 전한 황실(중앙정부)에 일으킨 반란이다. 경제景帝는 조조의 과격한 정책을 실행해 제후왕의 죄를 빌미로 조, 교서 초나라의 봉토를 삭감했다. 마침내 오나라에도 봉토를 삭감하려고 하자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한 유비는 6국의 제후왕들과 공모하여 간신 조조를 죽인다는 구실로 군사를 일으켰다. 결과는 황제국의 태위 주아부가 이끄는 군사들에 의해 오왕 유비를 비롯한 나머지 6국의 왕들은 모두 살해 당하고 전난은 3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참고로 상기한 조조는 위나라 태조 무황제 조조曹操(155~220년) 와 다른 인물이며, 오나라 왕 유비는 후일 촉한의 초대 황제인 열조烈祖 소열황제昭烈皇帝(161~223년, 재위 221~223년) 유비劉備와도 다른 인물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사기(사마천),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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