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17세 풍월주風月主 염장공廉長公(1) |
보스톤코리아 2020-08-31, 10:58:08 |
17세 풍월주 염장공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재물을 모으는데 욕심이 많아 16세 풍월주 보종공의 부제로 있을 때 보종의 가산과 낭도들의 재용을 관리하면서 많은 사취私取를 하였다. 당시 신라에서 제일가는 금입택에 살면서도 후세들로 부터 검소했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는 그 재물을 자신을 위하여 다 쓰지는 않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이 어리지만 김유신과 김춘추의 높은 뜻을 미리 간파하고 그들을 도와 삼한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닦는데 많은 조력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한 조숙한 그는 정신연령이 높아 6살이나 위인 풍월주 보종으로 부터 오히려 형 대접을 받았고, 건장한 체격과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통솔력과 지도력은 낭주郎主인 보종의 몫까지 차지하였다(동시에 보종은 염장에게 거의 일임하고 어조魚鳥와 화목花木사이에서 학鶴과 함께 신선처럼 살기를 좋아했다). 아울러 그는 영웅호색을 실감하게 하듯 첩이 17명이나 있었다. 그의 첩은 모두 그가 이끄는 낭두郎頭들의 딸이었다. 그는 첩을 각파에서 골고루 뽑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낭도들의 화합을 우선시 한것 같기도 하다. 그는 진골정통파에서 5명, 대원신통파에서 4명, 가야파에서 8명의 첩을 취하였다. 그리고 염장은 ‘칠숙의 난’ 을 진압하는데도 큰 공을 세워 선덕여왕 즉위 후에는 조부調府의 영令이 되어 김유신과 김춘추에게 많은 재물을 공급하였고 사적으로도 취부하는걸 잊지 않았다. 또한 그는 당시 신라의 대저택인 35채의 ‘금입택金入宅’ 중의 하나인 수망택水望宅을 소유하였고 거기서 기거하였다.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 금입택의 숫자는 35채인데, 실제로 기록된 숫자는 39채이다. 염장공이 소유했던 수망택이 유일하게 화랑세기에 등장하고 있다. 당시의 금입택은 현존하는 것이 없지만(아쉽게도 위치 마저도 알 수 없지만…), 김유신의 종택이었던 재매정택만이 그 집터를 남기고 있다. 염장공은 586년에 태어났으며 35세에 풍월주가 되었다. 그리고 63세인 648년에 죽었다(만62세). 그의 부모는 천주공天柱公과 지도태후知道太后이다. 천주는 진흥왕과 월화궁주의 아들이다. 월화의 부모는 가야 이뇌왕과 신라의 양화공주이다. 양화의 부모는 호조와 선혜왕후이다. 선혜왕후는 제21대 소지왕의 왕비였다가(사금갑 사건 이후) 폐출되어 문노의 조부인 호조와 사통하여 문노의 아버지 비조부를 낳았다. 염장의 어머니 지도태후는 일찍이 사륜(후에 제25대 진지왕)의 비로 용수와 용춘을 낳았다. 그리고 진지왕이(아마도 도화녀와의 사건으로, 삼국유사에는 진지왕이 죽은 후에 설화 형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폐위되고(579년)나서 곧 죽은 후 천주공과 결혼하여 염장공을 낳았다(586년). 지도의 부모는 기오공과 흥도이다. 기오는 부모는 홍기와 선혜왕후이다. 흥도의 부모는 영실과 옥진이다. 지도태후는 선혜의 손녀이고 천주는 선혜의 외손녀의 아들이다. 그들이 혼인하여 17세 풍월주 김염장을 낳았다. 즉 그는 용수와 용춘의 이부동모 동생이다. 용수는 김춘추의 생부이며 용춘은 형 용수가 죽은 뒤 천명을 부인으로 삼았고 춘추를 아들로 키웠다. 염장은 어려서 부터 건장한 체격으로 무도에도 자질이 있었으며 아울러 낭도들을 잘 이끄는 재능이 있었다. 또한 나이에 구분없이 윗사람들을 잘 섬기는 처세술도 좋았다. 그래서 어머니 지도태후는 일찍이 그를 호림공에게 보내어 함께 무도를 수련하며 동방 제일의 격검술의 보유자인 문노의 신기를 전수받게 하였다. 화랑세기의 기록을 보면, [공은 건복建福 병오년丙午年 생이고 신사년辛巳年에 화랑의 주主가 되었다. 태화太和 원년 무신년戊申年에 죽었다. 나이가 63세였다. 17세 염장공은 천주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도태후이다. 그러므로 공은 용춘공의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가 된다. 공은 풍채가 좋고 말을 잘했으며, 무리를 다스리고 윗사람을 잘 섬기는 재능이 있었다. 지도태후가 공을 사랑하여 용춘공에게 맡겨 호림공에게 속하게 했다.] 건복建福은 신라 제26대 진평왕과 제27대 선덕여왕의 연호이다. 584년2월에서 633년까지 49년 11개월 동안 사용하였다. 632년에 즉위한 선덕여왕이 634년에 인평仁平으로 개원하였다. 건복시대의 병오년은 586년이고 신사년은 621년이다. 그리고 태화太和는 제28대 진덕여왕의 연호이자 신라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마지막 연호이다. 647년7월에서 650년까지 만 3년 동안 사용하였다. 그리고 650년에 자장율사(선종善宗, 14세 풍월주 김호림의 아들)의 건의로 당나라의 연호를 받아드려 사용하면서 태화를 폐지하였는데 정확한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화랑세기에서 인용한 위의 기록에 보면 ‘태화 원년 무신년’ 인데 태화 원년은 정미년丁未年이고 무신년은 다음해인 648년이다(김대문이 화랑세기의 원본에 그렇게 오기誤記하였는지 아니면 필사자 박창화가 오필誤筆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화랑세기 원본이 일본에서 돌아와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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