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67 |
화랑세기花郞世紀, 11세 풍월주風月主 하종夏宗(8) |
보스톤코리아 2019-03-18, 10:42:43 |
전군殿君의 아들이라서 전군이 될 수 없었던 하종은 진흥왕이 미실을 특별히 총애하였기에 양자로 삼아서 전군에 봉해졌다. 그의 전군 봉행의식은 이부동생 수종과 함께 신궁에서 행해졌다. 화랑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帝가 공을 봉하려는 미실의 바램을 알고, 공을 제帝의 가자假子로 삼아 전군殿君의 위를 주어 미실의 마음을 위로했다. 미실은 이에 기뻐했다. 전군으로 봉하는 예를 수종壽宗전군의 탄생 77일에 행했다. 제帝와 더불어 미실전주, 수종전군 및 공이 함께 수레를 타고 신궁神宮에 이르러 예를 행했다. 미실의 기쁨이 지극하여 제帝의 품안에 엎드러지며 말하기를 “하루에 두 전군의 어미가 되었습니다” 했다. 제帝가 …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짐과 더불어 한 몸인데 어찌 다만 두 전군뿐이겠는가? … 가히 너의 아들이 될 수 있다” 했다. 이날 밤 제帝는 …에서 잔치를 베풀어 … 친히 축하하고, 태자太子 이하 왕자王子, 전군殿君에게 명하여 미실에게 절하고 어머니라 부르도록 했다. 태자는 미실과 더불어 사통私通한 바 있는 까닭에 억지로 절했다. 미실이 일어나 멈추며 말하기를 “태자는 다른 전군과 같지 않은데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습니까?” 했다. 제帝가 이에 명하여 태자에게는 일배一拜를 허락했다. 다른 사람은 사배四拜하고 일어났다. 제帝가 몹시 기뻐 취했고, 미실도 역시 취하여 서로 이끌며 장막으로 들어가고, 태자 이하가 만세(山呼)를 외치고 물러났다.] 당시 진흥왕은 정궁 사도황후를 비롯하여 미실, 보명, 옥리, 월화 등 다섯 궁주가 있었다. 하지만 풍질風疾 등으로 몸이 자주 불편한 왕은 미실을 제외한 다른 궁주들은 돌보지 않았다. 한편 태자 동륜은 부왕의 후궁인 보명궁주를 연모하였다. 보명의 거절에도 집착을 보인 태자는 어느날 수하들을 데리고 보명궁의 담장을 넘었다. 왕의 침전을 미실에게 빼앗겨 독수공방하며 지내던 보명은 태자와 사통을 하였다. 한번 풀은 보명의 치맛폭을 잊지못하고 동륜태자는 매일밤 담장을 넘었다. 일반적으로 집착은 괴로움을 수반한다지만 동륜의 집착은 그만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보명궁주를 찾기 시작한 칠일째 되는 날 밤, 그는 수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월담하였다. 수하들의 도움없이도 월담에는 성공하였지만, 뜰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나운 개는 불청객을 물어 뜯었다. 이에 보명이 많이 다친 동륜태자를 데리고 들어가 지극정성으로 치료하였지만 동이 트기도 전에 그는 그렇게 흉서하였다. 진흥왕의 후궁 보명궁주는 누구인가? 그는 지소태후(법흥왕의 딸, 진흥왕의 모후) 와 침신枕臣 구진仇珍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진흥왕과 동복이부 오누이인데 후궁이 되었다. 보명도 미실과 같이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등 3대의 후궁이었다. 또한 동륜태자와 사통한 것도 같다. 보명은 진지왕과의 사이에서 석명공주를 낳았고, 진평왕과는 양명공주를 낳았다. 양명은 미실의 아들인 보종(16세 풍월주, 아버지는 7세 풍월주 설화랑) 과 결혼하여 첫째 딸 보라궁주를 낳았다. 이 보라궁주가 김춘추의 첫 번째 부인으로 정궁부인이다(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 문희가 문명왕후로 제1왕후, 김유신의 첫째 여동생 보희가 제2왕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보라는 불행하게도 둘째아이를 낳은 뒤 산후병으로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요절하였다. 양명의 둘째 딸 보량궁주는 진평왕의 후궁이 되었는데, 진평왕의 계비 승만부인이 시기질투하여 출궁당했다. 그리고 후일 동복이부의 오라비 22세 풍월주 김양도와 혼인하였다. 즉 양명은 모종과의 사이에서도 아들 양도를 두고 있었다. 모종의 부모는 11세 풍월주 하종과 미모낭주이다. 근친혼이라 다소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신국 신라의 골품은 그렇게 이어져 내려왔다. 동륜태자가 개에게 물린 장면이 화랑세기에는 이렇게 실려있다. [당시 보명궁주가 태자의 연모를 받았으나, 몸을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태자는 이에 장사壯士 수인과 더불어 궁의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궁주가 미실과 더불어 왕의 총애를 다툴 수 없음을 알고 감히 태자를 힘써 거부하지 않아 기롱짓거리하게 되었다. 그 이후 태자가 매일 밤마다 넘어 들어왔다. 이레째 밤에 태자가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 들어가다가 큰 개에게 물렸다. 궁주가 안고 궁중으로 들어갔는데, 동틀 무렵 죽었다.] 이 때가 572년(진흥왕33년) 이었다. 부왕의 후궁을 탐하다가 당한 태자의 ‘개죽음’ 은 그의 업보였을까? 갑작스러운 태자의 죽음에 궁은 발칵 뒤집혔고, 진흥왕은 자초지종의 조사를 하명하였다. 당시 혈기왕성한 동륜은 미실의 동생 미생과 함께 궁내외를 가리지 않고 ‘어색漁色’ 에 탐닉하고 있었다. 그리고 밝혀지는 그들의 여색행각으로 왕의 분노는 탱천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www.gch.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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