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44 |
화랑세기花郞世紀, 9세 풍월주風月主 비보랑秘寶郞(5) |
보스톤코리아 2018-09-24, 10:36:07 |
이번에는 삼국사기(진평왕 9년 본기)에 실린 ‘대세와 구칠’이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간 사건을 참고한 화랑세기에 기록된 그들의 이야기를 인용해 본다. [처음 공이 동대공冬臺公의 아들 대세大世에게 천재天才가 있어, 전방대화랑으로 삼고자 했다. 그런데 대세의 어머니는 곧 실보實寶의 손아래 누이인 골보骨寶였으니, 대세는 공의 종제가 되었다. 사람들이 불평을 하여 이루지 못했다. 양위함에 이르러 미생공에게 부탁하여 대세에게 전방대화랑을 주었다. 얼마 안되어 미생의 첩의 동생인 제문랑諸文郞이 그 자리를 원하여, 대세가 유화를 탐했으며 술을 마시고 행동이 거칠었다는 것으로 책임을 물어 물러나게 했다. 대세는 이에 노하여 곧 들野에 나아가 자취를 감추었다. 대세와 덕명은 같은 나이로 몹시 그리워하여 몰래 서로 정을 통했다. 공은 알면서 꾸짖지 않았다. 대세는 그 은혜에 감동하여 마침내 덕명과의 관계를 끊었다. 스스로 모랑과 완적阮籍에 비교했고, 술을 마시면 번번히 울었는데, 유화들 중에 그를 사모하는 자가 많았다. 대세는 자기를 사모하는 자를 거절하지 않았다. 비보랑공은 그 아픔을 알고 가엾게 여겨 좌방화랑으로 삼았다. 얼마 안되어 다시 발탁하여 우방화랑으로 삼아 장차 크게 쓰일 것임을 보여주고, 대세에게 술에 빠짐을 절제토록 권했다. 잠시 괜찮게 되는 것 같았다. 미생공이 전방대화랑에 처음 발탁하고 나서 대세에게 권한을 주지 않았다. 대세는 본디 미생공에게 복종하지 않았는데, 이에 술을 마시고 미생이 탐욕스럽고 어리석어 가뭄을 불러 왔다고 욕했다. 미생공은 이에 심복 낭도를 시켜 그 황난荒亂 한 것을 공격케 했다. 공은 곧 사문沙門 담수로 하여 대세를 보살피게 하고, 때때로 술을 보내어 위로했다. 대세는 이에 발분하고 힘써 공부하여 신선의 참된 도를 터득하고자 했다. 친우인 구칠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갔다. 구칠 또한 공의 화랑이었다. 두 사람이 떠나가자 공의 심복 낭도들이 많이 불안해 했다.] 위의 인용문이 화랑세기에 실려 있다. 뒤를 이어 바로 화랑도의 분파 된 내용이 나온다. 구체적인 내용은 10세 풍월주 미생랑조에 기록되어 있다. 즉 대세와 구칠 그리고 승려 담수 3인의 등장으로 된 내용에서 삼국사기에는 대화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실려있다. 대세가 처음에는 담수와 동행하여 득도하자고 했지만 담수는 ‘머리를 깍고 불문에 들어 도를 닦는 사람’ 인 사문임에도 거절하였다. 그래서 대세는 동료 화랑인 구칠의 의중을 떠보기 위하여 ‘가랑잎배 경주’를 하였다. 그리고 나서 대세는 구칠과 의기투합하여 남해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나라 역사서에 기록된 최초의 이민자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삼국사기를 집필할 때 화랑세기를 참조했는데,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의 내용을 종합해 봤을때, 그들의 ‘이민’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된 또 다른 문헌이 당시에 존재했다고 보여진다. 대세는 단순히 신선의 도를 득도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화랑도를 중심으로한 조정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것이었다. 대세는 화랑도 조직 안에서 전방대화랑을 거쳐서 부제가 된 다음 풍월주가 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이 충분히 있었지만 미생 일파에게 밀려난 것이다. 통합원류파를 이끌며 또한 풍월주인 비보랑의 신임도 두터워서 부제副弟에 버금가는 실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부제이면서 미실의 동생인 미생과의 불화로 인하여 미생파에 의해서 입지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곧이어 미생이 풍월주로 취임하면서 대세를 화랑의 서열 3순위인 전방대화랑으로 기용하였다. 그러나 미생은 상선(전임 풍월주) 비보랑의 부탁이어서 내키지 않았지만 임명하였고, 그에게 실권은 전혀 주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세를 파직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첩의 동생 제문랑을 앉혔다. 파직의 명분은 대세가 유화들을 탐하고 폭음을 하며 행동이 거칠다는 혐의였다. 그런데 대세에게는 음주를 하고 나면 ‘황난荒亂’, 즉 거친행동을 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부인과 사통을 하여도 용서해주고 아끼던 후견인인 비보랑이 대세에게 여러차례 음주와 언행을 절제하라고 권고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전방대화랑 직에서 파직 당한 후로는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던 미생을 “탐욕스럽고 어리석어 가뭄을 불러왔다”고 공격하였다. 화랑세기에는 ‘비보랑이 풍월주로 재임한 기간에는 나라와 가정이 태평하고 곡식이 익고 백성이 배부르게 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모두 비보랑의 주O主O’ 라고 이어지는데 탈자가 있어서 정확한 해독은 안되지만 그가 풍년을 불러온 주인공이라고 추측해본다. 또한 ‘미생공이 취임함에 이르러 곧 봄에 가물어 곡식의 씨를 뿌리지 못했다. 진평왕이 반찬 수를 줄이고 죄수를 풀어주자 비가 왔다. 사람들이 미생공이 욕심이 많은 때문이라 생각했다’ 라는 기록이 이어진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도 교차 검증되는 기록이 있다. 미생의 탐욕에 대한 기록은 아니지만, 당시 가뭄에 대한 기록은 있다. 대세가 서해 바다로 떠나기 2년 전인 585년,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평왕7년조에 “봄 3월에 가물었으므로 왕이 정전正殿을 피하고 평상시 반찬 가짓수를 줄였으며, 남당南堂에 나아가 몸소 죄수의 정상을 살폈다’ 라고 기록 되어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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