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40 |
화랑세기花郞世紀, 9세 풍월주風月主 비보랑秘寶郞(1) |
보스톤코리아 2018-08-27, 10:28:24 |
9세 풍월주 비보는 문노가 풍월주로 있을 당시 부제로 화랑도의 2인자였다. 문노에 앞서 7세 풍월주는 설원랑이었는데 이때 부제는 미생이었다. 미생은 미실의 동생이다. 일반적으로 부제가 차기 풍월주를 잇는것이 관례였는데, 미생은 왕후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미실의 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8세 풍월주가 되지 못했다. 설원랑이 풍월주 재위 당시 문노가 이끄는 또 하나의 일문 호국선이 설원랑이 이끄는 화랑도인 운상인보다 못지 않았다. 두 무리 모두 의義를 갈고 닦았지만 문노의 낭도인 호국선은 무사武事를 좋아하여 협기가 있었고, 설원의 낭도인 운상인은 향가를 잘하고 청유淸遊를 즐겼다. 여기서 수장들의 특기가 낭도들에게 전해졌음을 볼 수 있다. 문노는 신라 최고의 격검술의 보유자였고, 설원은 노래와 피리연주를 잘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의 정치상황이었다. 실권을 잡고 있던 상대등 노리부와 세종(노리부는 사도태후의 오라비이며 세종은 미실의 남편이다. 화랑세기에는 노리부와 세종이 다른 인물로 등장한다), 사도태후와 미실이 황음무도한 진지왕을 폐위할때 문노가 이끄는 낭도들, 즉 협기가 충천한 무사들이 필요하였다. 그 결과 설원랑 다음의 풍월주는 풍유만을 즐기던 미실의 동생 미생이 아닌 문노에게로 이어졌다. 그리고 582년, 문노가 이임하면서 자신의 수제자인 비보랑에게로 풍월주 지위를 잇게하였다. 비보랑은 기사생己巳生이니까 549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비대전군이다. 비대전군은 법흥왕과 옥진궁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비보의 어머니는 실보낭주이다. 실보의 어머니는 삼엽궁주이며 아버지는 아시공이다. 삼엽은 법흥왕과 벽화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법흥왕의 외손녀인 실보와 아들인 비대공이 혼인하여 비보랑이 태어났다. 2세 풍월주를 역임한 미진부공이 비보랑의 외삼촌이다. 비보의 외조모 삼엽은 아시공에게 시집가서 미진부, 골보, 실보낭주, 말보를 낳았다.234) 549년생인 비보는 설원랑과 동갑으로 어려서부터 친구로 지냈다. 설원은 나중에 설화랑으로 불리었고, 아버지는 설성이며 어머니는 금진낭주이다. 금진은 옥진의 동생이다. 금진도 언니 옥진과 함께 법흥왕의 후궁으로 있다가 아이를 낳지 못해서 출궁당했다. 그러자 그녀를 너무나 사모하여 5년간 발원기도를 한 구리지가 찾아가서 사랑을 고백하고 혼인하여 살면서 토함과 새달 그리고 5세 풍월주 사다함을 낳았다. 그 후 548년 구리지는 독산성전투에 참전하였다가 거기서 전사하였다(삼국사기권4, 진흥왕9년 2월). 그러자 이번에는 구리지의 용양신으로 있던 설성이 금진과 동침하여 549년 설원랑이 태어났다. 비보와 설원은 함께 노래와 옥적玉笛(피리)을 배웠다. 그런데 비보는 소질이 없었다. 반면에 설원은 아버지 설성의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왕성에서 따를자가 없었다. 또한 비보는 문노의 수하에 들어가서 격검술을 배웠다. 가장 뛰어난 수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문노가 선화仙花(호국선 화랑)와 풍월주가 되자 부제로 발탁되었다가 문노를 이어 풍월주가 되었다. 그는 문노가 한것 같이 천한자들도 낭도로 받아드리고 약자들을 돕는데도 힘썼다. 그는 582년에 풍월주의 위位를 받았는데 3년간 재임하였다. 이임할때 많은 낭도들이 아쉬어했다. 화랑세기에는 이렇게 전한다. [비보秘寶는 기사년생이고 임인년에 화랑의 주主가 되었다. 9세 비보랑은 비대전군比臺殿君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실보낭주實寶娘主인데 곧 미진부의 누이였다. 공은 설원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함께 노래를 배웠으나 설원공에게 미치지 못했고, 피리를 배웠으나 역시 설원공에게 미치지 못했다. 이에 문노에게 나아가 검을 배워 마침내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되어 문노를 힘써 보좌했다. 문노가 선화仙花가 되자, 그 공으로 그의 부제가 되었다. 이에 이르러 9세 풍월주가 되었다. 문노의 법제를 힘써 따르고 미천한 자를 발탁하고 약한 자를 구하는데 힘썼다. 낭도를 나누어 보내어 변방을 지키는 이들을 위로했다. 당시 미생공은 설원공의 부제로 오랫동안 위에 오르지 못했다. 문노공이 이에 양위를 명했다. 공은 또한 3년간 재위하니 낭도들이 아까워했다. 때는 건복建福2년(585년) 춘정월이었다.] 234) 법흥왕은 벽화를 후궁으로 맞아드리면서 1세 풍월주인 위화랑의 충성을 확인하였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삼엽을 총애하는 신하 아시공에게 시집보내면서 좌우를 혼인관계로 공고히 하였다. 또한 삼엽은 진흥왕을 지지하여 아시공의 정치적인 기반도 확고히 다졌다. 당시 신라 제일의 미녀라고 기록된 벽화는 제21대 소지왕이 날이군(현 경북 영주)에서 데려와서 후궁으로 삼았다(서기 500년). 그리고 그해 말 왕위는 지증에게로 이어졌고, 지증왕이 즉위하면서 태자 김원종(후에 법흥왕)이 벽화를 차지하였다. 위화랑과 벽화는 남매지간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나무위키,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www.gch.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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