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11 |
화랑세기花郞世紀, 8세 풍월주風月主 문노文弩(2) |
보스톤코리아 2018-01-29, 11:23:19 |
1179년에 경대승이 정중부 일파를 제거하고 실권을 잡았다. 하지만 경대승은 집권 4년만에 30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무신정변으로 무너진 왕조를 회복하려했던 그는 아이러니칼하게도 명종과 정변을 일으킨 무신들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죽자, 명종은 무신정권을 종식하고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인데도 그 자리에 이의민을 불려 들렸다(아마도 명종은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무신들을 너무나 좋아했거나 아니면 이의민이 무력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이의민이 누구인가? 그의 아버지는 소금장수였고 어머니는 사원의 노비였다. 천민 출신인데 8척 거구의 체격에다 상상을 초월하는 체력, 그리고 수박도의 무예가 달인의 경지에 있었으니 힘으로는 당할 자가 없었던 당대의 천하무적이었다. 그는 김보당이 임금 의종을 복위하기 위하여 거사를 꾸밀때, 앞장서서 김보당의 무리를 제거하였고 의종마저 맨손으로 등뼈를 꺾어서 살해한 후 가마솥에 넣어서 연못에 던졌다. 이로 인하여 경대승은 너무나도 무자비한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의민의 집권시에는 농민들이 수탈을 견디지 못해 유랑민이되었고, 그들은 또 도둑이 되기도 했고, 결국은 힘을 합쳐 조직적으로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난이 경상도에서 일어난 김사미, 효심의 난이다(명분이 옛 신라의 부흥이라 이의민이 진압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이의민은 못난 아들 때문에 명을 제촉하였다. 당시에는 비둘기가 그렇게 귀중했던지…? 이의민의 아들이 최충헌 아들의 비둘기를 훔쳐가다가 발각이 되었고, 이것이 그만 집안싸움으로 번져 결국 이의민의 일가가 최충헌 일가에 의해 몰살을 당했다. 여기 까지가 전반기 30여년의 무신정치이다. 비둘기 한 마리가 원인이 되어 마침내 62년간 고려를 다스릴 최씨무인정권의 막이 올랐다. 1196년 이의민을 처단하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 그는 사실 문관집안의 출신이며 음서로 관리에 진출한 전형적인 문벌귀족이다. 그리고 그가 이의민을 처단한 명분은 ‘왕을 죽인자’ 와 ‘신라 부흥이라는 헛된 꿈을 꾸는자’, 즉 대역죄인를 제거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왕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소위 ‘봉사10조’라 불리는 상소문인데 그 내용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우국충신’의 표상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우국충정은 간데없고 1년만에 명종을 폐위 시키고 새로운 왕 신종을 물론 ‘허수아비’로 옹립하였다(1197년). 그리고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정치를 장악하고, 대농장을 수탈 소유하여 경제적 기반을 조성하였으며, 도방과 삼별초를 통하여 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동생 최충수의 욕심으로 개성에서 시가전도 했다. 최충수는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최충헌이 허락하지 않아 형제는 격돌하게 되었고 최충수는 제거되었다(당시에 정권을 잡았던 무인들은 왕실과 혼인을 하였고, 또 하려고 했다. 신분상승을 위한 세탁과정이었을까?). 이윽고 신종이 병약하여 왕위는 아들 희종에게로 이어졌다(1204년). 하지만 희종은 신하를 신하로 부르지도 못했다. 최충헌을 왕마저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는 특별한 호칭으로 불러야 했다. 이 와중에서 최충헌을 제거하려는 세력들이 형성되었는데 임금 희종도 그 일원이었다. 하지만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희종은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처형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왕으로 60세의 강종이 즉위하였다(1211년). 강종은 2년 후 죽고 그의 아들 고종이 왕좌를 이엇다(1213년). 스스로 왕이 될 수도 있었던 최충헌은 왕보다 위에서 모든 부귀와 권력을 누리다가 71세에 자연사하였다. 그리고 큰 아들 최우(후에 최이로 개명)가 권력을 이엇다. 1231년 징키스칸의 몽골제국이 고려를 침략했다. 그들의 말발꿉에 초토화된 나라는 재침에 두려워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였다(1232년). 무신정권을 위협한건 몽골의 침략보다도 시시때때로 일어난 민란들이었다. 농민들뿐만 아니라 노비들도 난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난이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을 수 있겠는가?’ 라며 노비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만적의 난이다. 당시 몽골이 쳐들어 왔을때 최우는 항전을 하기보다는 군사들도 하여금 자신의 집을 잘 지키라고 했을 정도였으니 어찌 나라가 초토화 되지 않고 백성들이 도륙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최우는 이후 죽을때까지 몽골병사가 무서웠는지 민란이 무서웠는지 몰라도 강화도에서 나오지 않고 30여년을 육지의 백성들에게서 수탈한 물자로 호의호식하였다. 최우는 정실부인에게서는 아들이 없었고 첩으로 부터 망나니같은 최만종과 최항을 얻었다. 그래서 사위 김약선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아들들은 승려가 되라고 사원으로 보냈다. 하지만 두 아들은 불경은 안 읽고 온갖 비행들만 저질렀다. 악화되는 민심으로 인하여 도성으로 다시 불러드렸다. 그러더니 최우는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김약선을 죽이고 둘째 최항으로 후계자를 삼았다(1249년). 난국을 조정할 능력이 없는 최항은 아버지 사망 이틀 후에 상복을 벗고 아버지의 첩을 겁탈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또한 조정에는 김약선을 지지하던 세력들이 많았는데 그가 처형 당하자 구심점을 잃게 되었고, 최항은 그들과 대립하면서 분열되었고 결국 그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게다가 1253년, 1254년 몽골군은 침략하였고 최항은 항전도 없이 강화도에서 흥청망청(이 말은 조선 연산군 시절 생긴 것이다) 격구와 유흥으로 세월을 보냈다. 전쟁으로 인구는 감소되었고 경제는 피폐되었으며 민심은 흉흉해져만 갔다. 멍청하고 무능한 최항은 그러다가 8년 후 죽었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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