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03 |
화랑세기花郞世紀, 7세 풍월주風月主 설화랑薛花郞(10) |
보스톤코리아 2017-11-13, 13:58:57 |
7세 풍월주 설화랑과 8세 풍월주 문노의 이취임식을 마친 미실은 한 없이 기뻐하였다. 자신의 심복인 설화랑은 풍월주 지위를 내려놓고 나서 자신의 호위대장이 되었고, 당시 화랑도들이 가장 존경하고 따르던 화랑 중의 화랑 문노를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끌어드리고 나서 차기 풍월주에 앉혔으니…, 원화로서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으랴! 미실은 남편 세종이 풍월주로 있었을때 원화가 되어 세종을 경외로 내보내어 국경을 방비하는 전투를 하게 하였고, 진흥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면서 전주가 되어 실권을 잡았다. 동시에 화랑의 우두머리인 원화가 되어 문무신文武臣을 모두 거느리며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다. 진흥왕이 사망한 뒤에도 진흥왕비 사도태후와 함께 진지왕을 옹립하여 권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 진지왕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자, 노리부를 중심으로 한 정계와 세종을 중심으로 한 화랑의 세력을 지휘하여 진지왕을 폐하고 진평왕을 세웠다. 그 거사 전에 두파로 갈라져 있던 화랑도를 통합하면서 문노의 세력을 흡수하였고, 설원랑의 충성심을 재차 확인하였다. 한편 문노는 미실에게 보다는 세종전군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세종과 함께 전장을 누비면서 세종으로 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세종은 미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생모 지소태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러차례 간청하여 마침내 결혼하였다. 그리고 그 후 미실이 진흥왕(세종의 이부동복 형)을 비롯하여 수 많은 남자들에게 색공을 하고 색사를 나누었지만, 세종은 미실을 지극히 받들어 섬기면서 오히려 부족함이 있을까 항상 염려하였다. 이런 일면을 지닌 세종에게 문노는 감복하여 항상 그에게 굽히며서 충성을 다하였다. 8세 풍월주를 수락한 것도 미실의 뜻을 받아드린 것이 아니라 세종의 뜻을 받아드린 것이었다. 이렇듯 두 화랑의 수장인 설화랑은 미실에게 모든것을 바쳐 충성을 다하였고, 문노는 세종에게 시종 동일하게 충성을 다하였다. 설화랑은 풍월주를 문노에게 양위하고 미실을 호위하는 호위대장이 되어 미실을 따라 영흥사永興寺219) 로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실이 기이한 질병에 걸렸다. 그러자 설화랑은 옆을 떠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간병을 하였다. 그리고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기도한 끝에 마침내 그가 미실을 병을 대신하고 이승을 하직했다. 그때가 606년 7월이었다. 화랑세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미실이 듣고 기뻐하며 설원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로 하여금 먼저 굽히게 한 것은 오늘이 있기 때문이다” 했다. 설원이 절하며 감사드리며 말하기를 “신의 머리카락 하나와 살갗 하나도 총주의 소유가 아닌것이 없습니다. 또 어찌 많은 말을 하겠습니까?” 했다. 문노는 국선으로 화랑의 우두머리가 된 까닭에 선화仙花라 했다. 문노의 무리에서 불평하는 자가 있어 문노에게 일러 말하기를, “선화가 먼저 스승이 되었다가 후에 제弟가 된 것은 궁주에게 팔아 먹힌 것이 아닙니까?” 했다. 문노가 꾸짖어 말하기를 “궁주는 전군이 받드는 바이다. 어찌 감히 말이 있을 수 있는가?” 했다. 이에 그 무리는 감히 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대개 문노의 뜻은 미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종을 위한 것이었다. 세종이 미실을 지극히 받들고 섬기면서도 오히려 모자람이 있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문노는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설원은 양위를 하고 미실을 따라 영흥사로 갔다. 설원은 거느린 낭도를 택하여 미실이 출입하는 것을 호위하며 사신두상私臣頭上이 되었다. 후에 미륵선화라는 이름을 더했다. 미실에게 끝까지 처음과 같이 한 자는 설원이고 세종에게 끝까지 처음과 같이 한 자는 문노였다. 성하고 지극하다. 공은 건원建元 14년(549년)에 나서 건복建福 23년(606년) 7월에 죽었다. 그 때 미실 궁주가 이상한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공은 밤낮으로 옆에서 모셨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했다. 마침내 그 병을 대신했다.] 설원랑, 그는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미혼모’인 할머니 ‘설씨녀’의 아들인 설성(모계의 성을 따랐다)의 아들로 태어나서 풍월주를 지낼만큼 성盛하였다. 그 때부터 그의 가문은 번창하기 시작하였고 ‘해골 물 마시고 득도 한’ 원효대사를 증손자로 두었다.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 중 수도암지 인근 토굴에서 잠을 자다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의 진리를 깨닭고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와 분황사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 를 제창하였다. 그가 득도한 수도사修道寺는 전통사찰 28호로 지정되어 현재도 경기도 평택에 전한다. 219) 영흥사, 삼국유사와 화랑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법흥왕이 후궁인 옥진궁주(1세 풍월주 위화랑과 오도낭주의 딸)를 총애하면서 정비인 보도로 하여금 비구니가 되게하였다. 오도는 보도왕후와 이부동복의 자매이다. 오도의 부모는 묘심과 선혜왕후이며, 보도의 부모는 소지왕과 선혜왕후이다. 영흥사는 최초의 비구니 사찰이며 535년(법흥왕 22년)에 창건하기 시작했다. 이 사찰은 신라인들이 신성시하던 숲인 천경림에 세워졌다. 현재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하고 있으며, 절터에서 출토된 석조유물들이 학교 정원과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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