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77 |
화랑세기花郞世紀, 6세 풍월주風月主 세종世宗(6) |
보스톤코리아 2017-05-08, 11:32:55 |
[공公은 …와 더불어 …. … 몇 달 앞섰다. 태후는 시험 삼아 공경公卿의 미녀들을 택하여 궁중에 모아 두고 공이 누구에게 마음이 향하는가를 보았다. 공은 미실낭주를 가장 좋아했다. … 태후는 이에 제帝에게 물어 말하기를 “미실의 아름다움이 전군殿君에게 … 합니까?” 했다. 제帝 또한 아름답게 여겨 말하기를 “오직 어머니가 정할 바 입니다. 단 … 태종苔宗 노신이 알지 못해서 …” 했다. 태후 또한 그렇게 여겼다. (이에 태종을 불렀다) 미실로써 의논하여 말하기를, “며느리를 얻는 데 지아비에게 의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했다. 태종이 말하기를 “폐하의 집안일에 어찌 감히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했다. 태후가 말하기를 “이 처녀는 곧 영실英失의 손입니다. 나의 우군右君으로 영실은 나에게 잘못이 많았기에 꺼렸습니다. 그리하여 좋아하지 않게 되어 결정하기 어려운바 되어 묻는 것입니다” 했다. 태종이 말하기를 “영실은 (법흥왕의) 총신입니다. 유명遺命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나무라서는 안 됩니다. 전군이 이미 좋아한다면 또한 황후<사도思道이다>를 위로할 수 있으니 옳지 않겠습니까?” 했다.] 미실美室,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웠다는 미실이 여러 미녀들과 함께 입궁하여 화랑의 사표 세종전군의 정처로 간택되는 장면이다. 유명한 사람은 항상 출생의 신화를 가지고 태어나는것 같다. 미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실의 외할머니인 옥진궁주, 법흥왕의 후궁으로 있던 그녀가 하루는 꿈에 칠색조가 나타나 자신의 품으로 들어 왔다면서 왕과 동침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왕은 이는 빈첩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라면서 남편인 박영실과 합하기를 명했다. 그리고 왕은 왕자이면 태자로, 딸이면 후궁으로 삼겠다고 하였는데, 이후 태어난 아이가 딸 묘도이다(묘도부인은 너무 어린나이에 법흥왕의 후궁으로 들어와 제대로 왕을 받들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옥진의 꿈에 또 칠색조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묘도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묘도의 거처를 찾아가 보니 딸 묘도는 남편 미진부와 함께 있었다. 옥진은 그들에게 귀한 딸을 낳을 것이라 하였고 이렇게 태어난 예언의 아이가 미실이다. 미실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를 닮아서 백화의 영검함을 뭉쳤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다(화랑세기 11세 풍월주 하종조)’. 옥진은 미실의 외할머니이며, 벽화는 미실의 증조할머니이고, 오도는 옥진의 어머니이다. 세명 모두 당대의 가장 미인들 중의 한명이었다. 법흥왕은 옥진의 미모에 빠져 자신의 총신 박영실의 부인이 된 그녀를 결국 후궁으로 삼았다. 벽화는 비처왕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못잊어 경주에서 날이(현 경북 영주)까지 변복을 하고 몇 차례 왕래를 하다가 결국 왕궁으로 데려와 후궁으로 삼았다. 오도 역시 법흥왕의 후궁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옥진은 오도의 딸이다. 이렇게 대원신통의 미색의 정기를 타고 태어난 미실은 3대 왕(제 24대 진흥왕과 그의 아들 제 25대 진지왕 그리고 진흥왕의 장자 동륜태자의 아들 제 26대 진평왕에 이르기까지) 에 걸쳐 색공을 했다. 아울러 미실의 권력은 왕권에 버금하면서 정치는 물론 진지왕의 옹립과 폐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미실의 아버지는 미진부이고 어머니는 묘도부인이다. 미진부의 부모는 아시공과 삼엽궁주이다. 묘도는 아버지가 박영실이고 어머니는 옥진궁주이다. 또한 진흥왕의 비 사도왕후와는 자매지간이다. 박영실의 부모는 수지공과 보현공주이다. 옥진의 부모는 위화랑과 오도이며, 오도의 어머니는 비처왕의 비인 선혜왕후인데 중僧 묘심과 사통하여 오도를 낳았다. 세종전군이 미실을 가장 좋아하였지만 지소태후는 탐탐치 않게 생각하였다. 미실이 자신의 계부인 박영실의 외손녀이기 때문이었다. 지소는 아버지 법흥왕의 명에 따라 계부 영실공과 결혼했지만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미실이 대원신통의 인맥姻脈이었기에 자신의 진골정통으로 인맥을 이으려한 계획에 어긋나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소태후는 진흥왕의 의견을 따라 미실을 며느리로 맞는데 세종의 생부인 태종의 의견도 들어 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태종은 왕실의 대사라면서 말을 아꼈다. 동시에 혼인을 함으로써 영실공과 관계도 회복되고 또한 사도왕후(진흥왕의 왕후, 박영실의 딸, 미실의 이모) 도 기쁘게 할 것이라며 결혼에 찬성하였다. 그런데 이 때의 역사적인 배경이 561년 봄이나 여름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흥왕23년과 권44, 열전4, 사다함)와 화랑세기(4세 이화랑, 5세 사다함, 8세 문노 등)에 보면 561년 9월에 대가야가 반란을 일으켜 왕이 태종으로 하여금 진압케 하였다. 여기에 어린 사다함(15,6세 가량)이 참전을 간청하였기에 왕이 태종의 귀당비장으로 임명하여 참전을 허락하였다. 이때 사다함의 연인인 미실이 지소태후에 의해 출궁되어 있다가 이별의 아픔을 담아 ‘송출정가’을 불러 사다함을 위로하였다. 미실이 또 다른 많은 미녀들과 궁에서 생활하다가 세종의 배필로 낙점을 받았지만, 지소의 미움을 받아 출궁되었다(자세한 내용은 다음회에 이어진다). 그리고 사다함은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해가 가기전에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하였다. 왕경으로 돌아와 보니 사랑하는 연인 미실은 이미 세종전군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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