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45 |
보스톤코리아 2016-09-19, 12:17:00 |
[이화랑의 아들인 원광법사는 숙명공주의 소생이다. 임신을 할때 공주는 이화랑을 사모하는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 화가 이화랑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자살을 하려 했다. 갑자기 금불이 와서 고하기를 “나는 곧 약사불藥師佛이다. 공주의 배를 빌려 머물고자 한다” 했다. 공주는 이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배례하니, 부처가 공주를 안고 엎드러져 마치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 때 공 또한 공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궁중으로 침범했는데, 공주가 바로 누워 마치 품고 있는 것을 잃은 것 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까닭을 묻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곧 부처의 원력이다” 했다. 몸을 섞고 낳으니, 과연 대성여래大聖如來이다.] - 지금까지 ‘화랑세기’의 원문은 1995년에 출현된 발췌본이며, 이종욱이 번역한 ‘대역 화랑세기’(2005, 소나무)를 인용했다. 숙명공주는 지소태후(진흥왕의 어머니)와 이사부(태종) 사이에서 태어났다. 물론 지소태후의 남편은 입종이며, 진흥왕은 입종의 아들이다. 숙명공주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나오지 않고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지소의 딸이다. 지소태후는 진골정통으로 왕통을 잇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 진흥왕에게 이부異父의 딸인 숙명을 후비로 들이게 했다. 진흥왕은 어릴때 부터 왕후로 맞아들인 사도왕후를 사랑하였고, 숙명과는 동복의 남매지간인지라 후비로 맞이하는데 탐탁치 않았고 부인으로 전혀 사랑하지도 않았지만 숙명의 배후세력, 즉 진골정통의 가계로 인하여, 하는 수 없이 후비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진흥왕과 숙명공주 사이에서 아들 정숙이 태어났고, 진흥왕의 정비인 사도왕후의 장자 동륜이 있었지만 지소태후의 의도로 정숙이 태자가 되었다. 하지만 숙명은 공주시절 부터 통정한 이화랑이 있었으며, 왕후가 된 뒤에도 그들의 밀통은 지속되었다. 결국 그들의 사통 행각은 들통이 났고, 급기야 둘은 궁밖으로 멀리 도망쳤다. 그로 인해 정숙태자는 혈통의 의심을 받게되어 폐태자되었으며 숙명왕후 역시 폐비가 되었다. 그리고 비워진 태자의 자리에 동륜이 올랐다. 사도왕후는 자신의 아들 동륜을 태자로 옹립하기 위하여 지소태후에게 이화랑과 숙명을 용서해 주길 간청하였고, 지소는 사랑하는 딸을 버릴 수 없어서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그 후 그들은 원광과 보리, 그리고 두 딸 화명과 옥명을 낳았다. 원광은 우리나라 불교를 크게 중흥한 법사가 되었고, 보리는 화랑도의 12세 풍월주(591~596)를 역임했다. 이 보리공이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의 증조할아버지이다. 보리의 정처는 만룡부인이며, 이 만룡이 정숙태자의 딸이다. 또한 숙명의 두 딸 화명과 옥명은 진평왕의 후궁이 되었다. 화랑세기에서 보면 원광법사의 혈통이 뚜렸하다. 김대문의 큰증조할아버지이며, 이화랑의 아들이다. 이화랑의 아버지는 위화랑이고, 위화랑의 아버지는 섬신공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원광법사의 속성이 박씨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원광서학조에 보면 ‘당속고승전唐續高僧傳’ 제13권을 인용하여 원광에 관하여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 황룡사의 중 원광의 속성은 박씨이다. 본래 삼한, 즉 변한 진한 마한에 살았으니, 원광은 곧 진한 사람이다. 대대로 해동에 살아 조상의 풍습이 멀리 계승되었다. 그는 도량이 넓고 컸으며, 글을 즐겨 읽어 현유玄儒와 자사子史도 연구하여 글 잘한다는 이름을 삼한에 떨쳤다.” 이렇게 시작되는 내용은 더 배우고 싶어서 25세에 중국으로 갔다. 진陳나라로 가서 불교의 이치를 배우고는 그때까지 알았던 지식이 마치 썩은 지푸라기 같아서 진나라 임금에게 청하여 계를 받고 중이 되었다. 삼장三藏과 석론釋論을 두루 연구하였고, 끝으로 오나라 호구산에 올라가 불도를 닦으니 중의 무리들이 그의 설법을 들으려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의 명망은 중국남방에 까지 전파되었고, 당시는 수隋나라의 문제가 진陳을 점령하였을 때였다. 그는 학문이 남방의 오월吳越을 통달했기에 북쪽의 주나라와 진秦나라의 문화를 보고자 589년에는 수나라 수도로 유학했다. 그의 섭론攝論은 북쪽지방에서도 드날렸다. 이때 신라에서는 그의 명성을 듣고 수나라 임금에게 원광을 보내달라고 자주 청했다. 여러해 만에 돌아온 원광은 왕으로 부터 성인聖人 대우를 받았다. 수레를 타고 궁궐을 출입하게 했으며, 의복과 약 그리고 음식을 왕이 직접 챙겼다. 그는 640년(신라 건복 58년) 황룡사에서 앉은 채로 9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 때가 당나라 정관 14년이었다(일연이 인용한 ‘당속고승전’에는 정관4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4년으로 함이 옳다고 고쳐 잡아 재기록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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