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44 |
보스톤코리아 2016-09-12, 11:48:16 |
[이화랑공은 이에 풍월주의 지위를 넘겨주고, 토함공과 더불어 오로지 궁중에서 태자를 보양하는 데 힘썼다. 아! 성대하다. 공의 맑은 덕과 영화로운 이름은 만세에 끊이지 않을 것이다. 공은 숙명공주와 더불어 영흥사에 나가 살며 불도에 전심했다. 지소태후 또한 뒤따라 귀의했고, 숙태자 또한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이렇게 풍모가 수려하고 언행이 방정한 사다함 밑으로 당시 신국神國 신라에서 격검의 최고수 문노를 비롯한 많은 화랑도들이 들어오면서 사다함의 세력이 천여명을 넘게되자 이화랑은 풍월주의 자리를 사다함에게 넘겨주었다. 이때 사다함의 나이가 16세 가량이었다. 사다함은 547년에 출생하였다. 그리고 태종(이사부)가 562년 진흥왕의 명으로 가야를 정벌할 때 15~6세의 어린 나이에 왕에게 여러번 간청하여 출전하였다. 당시 절세가인 중의 하나인 미실이 그의 연인이었는데, 사다함을 전쟁터로 보내면서 부른 노래가 ‘풍랑가(송출정가)’ 로 화랑세기에 전하고 있다. 그리고 사다함은 전장에서도 역시 자청하여 선봉에 섰으며 가야의 성문 전단량을 기습하여 승전의 결정적 공을 세웠다. 그는 전공으로 노비 300명과 전답을 받았으나, 노비는 모두 양민으로 살게하였고 전답도 알천閼川의 불모지를 대신 받았다. 그리고 이 전답마저도 부하 낭도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다. 비록 나이 어린 사다함이었지만 여러면에서 신라의 큰 인물이 될 대인배의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17세의 나이로 화랑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죽었다. 사다함에게는 어려서 부터 ‘사우死友’를 맺은 친구 무관랑武官郞이 있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관랑은 사다함과 동갑인 547년에서 출생하였고 564년에 병사했다(화랑세기에는 사다함이 어리다). 그래서 사다함이 그의 죽음을 접하면서 7일 동안 통곡을 하다가 자결하였다. 반면 화랑세기에서는 무관랑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 좀더 자세하게 전한다. 사다함의 친모 금진낭주는 색정을 아주 밝히는 여인이었다. 특히 구리지가 백제와의 전투에서 사망하고 또 설성이 가야정벌에서 죽은 후로 더 많은 남자들을 탐하였다. 그는 입종(진흥왕의 친부)과도 숙흘종을 낳았다. 금진낭주는 4세 풍월주 이화랑과 이복남매지간이다. 위화랑(1세 풍월주)이 정부인 준실부인으로 부터 이화랑을 낳았고, 옥진과 금진은 정인인 오도부인의 딸들이다. 이 금진낭주가 구리지와의 사이에서 사다함과 형인 토함 그리고 누이 새달을 낳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바로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이며 사신私臣인 무관랑을 침실로 불러드려서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그리하여 무관랑은 주변으로 부터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사다함은 무관랑에게 “어머니의 잘못이지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위로하였다. 그러나 무관랑은 수 많은 낭도들의 비난에 괴로워 하면서 월성을 뛰어 넘다가 그만 구지(해자, 성 밖에 성을 따라 파 놓은 넓은 도랑 또는 연못)에 빠져서 크게 다쳤다. 그리고 며칠을 앓다가 죽었다. 이에 애통한 사다함은 오열만 하다가 병에 걸려 죽었다. 위의 내용이 화랑세기에 전해진다. 사다함은 죽기 전에 차기 풍월주는 세종이 합당하다면서 그를 추천하였다. 세종은 진흥왕의 이부동복 동생이다. 그리고 이 세종이 사다함의 연인이었던 미실의 남편이다. 사다함이 가야정벌에서 돌아오니 연인 미실은 이미 세종과 결혼하였다. 그 때 미실을 잊지 못해 부른 슬픈노래가 ‘청조가’이며, 화랑세기에 전하는 또 다른 한 수의 향가이다. 후일 미실의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어 아들을 낳아야 겠다.”고 했다. 그래서 미실이 세종에게 말했고 그들은 관계를 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하종이다(사다함과 미실 그리고 하종의 자세한 내용은 5세 풍월주 사다함편과 11세 풍월주 하종편에서 다룰 것이다). 사다함은 이렇게 어린나이에 죽었기에 후손이 있다는 기록이 정사에는 없는데, 일설(위키백과)에는 아들이 김원훈이며 손자는 김효방이라고 전한다. 김효방은 제37대왕 선덕왕(김양상)의 아버지이다. 아마도 사다함이 내물왕의 7세손이고, 김효방이 9세손이라 그렇고, 김효방이 성덕왕의 사위이며 선덕왕의 아버지이지만 가계가 분명치 않기에 전해지는 설로 보인다. 풍월주의 지위를 사다함에게 넘겨준 이화랑은 토함공과 함께 태자인 동륜을 보양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리고 말년에는 부인 숙명공주와 함께 영흥사에 가서 불도佛道에 전심을 다하였다. 곧이어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도 불가에 귀의했고, 폐태자된 정숙 역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정숙태자는 진흥왕과 숙명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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