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42 |
보스톤코리아 2016-08-29, 13:19:24 |
[그 때 비조공比助公의 아들 문노文弩 또한 호걸로 격검을 잘했다. 이화랑공은 사다함으로 하여금 문노에게 검을 배우게 했다. 문노가 말하기를 “검은 곧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인데, 어찌 고귀한 사람이 알 필요가 있습니까?” 하자, 이화랑이 말하기를 “한 사람을 대적하지 않으면 곧 어찌 능히 만인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 아이는 호협豪俠을 좋아하니 비록 무리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 적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네가 그를 보호하라” 했다. 문노가 이에 낭도 오백으로 따르니, 그 위세가 토함보다 컸다.] 생몰년이 미상인 문노는 후에 8세 풍월주가 된다(538년생, 606년몰이란 기록도 있다). 아버지는 비조부이며 어머니는 가야국의 왕녀인 문화공주이다. 아버지 비조부는 선혜왕후(제21대 비처왕의 후)의 아들이다. 원래 문화공주는 비조부의 아버지 호조好助의 첩이었으나 비조부와 밀통을 하여 문노가 태어났다. 할아버지 호조 역시 선혜왕후와 사통을 하여 문노의 아버지 비조부를 낳았다. 가계가 상당히 복잡하고 윗대들의 문란한 것 같은 성관계에 의해 출생한 문노이다. 당시 사회상으로 비춰보면 문노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태어났다. 그리고 문노는 어머니가 가야의 공주였고, 할머니가 왕후였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밀통과 사통을 하여 태어난 때문인지 골품이 없었다. 그는 나중에 골품을 얻었다. 문노의 무예와 검술은 수 많은 화랑 중에서도 아주 걸출하였다. 그의 격검은 대적할 낭도가 없었으며 특히 그의 검술은 신기에 달했다고 한다. 무예도보통지에 보면 양날의 칼은 검劍이고 외날의 칼은 도刀라고 했는데, 우리나라의 문헌들을 보면 고서일수록 검劍으로 표기되었고 후대로 오면서 검과 도를 병기하고 있다. 이 점은 좀 더 연구할 과제를 남기고 있다. 과연 삼국시대에는 양날의 칼인 검만 사용했는지? 아니면 검과 도를 모두 검으로 통용했는지? 또한 만일 후대에 와서 도刀를 병기로 이용했다면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도 일말의 호기심을 남기고 있다. 이렇게 신기神技의 검술을 소유한 문노에게 위화랑은 사다함으로 하여금 검술을 배우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노는 “검술은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인데, 어찌 고귀한 사람이 알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한 말은 여러가지를 함축하고 있다. 먼저 문노와 사다함의 신분의 고하가 있었으며, 당시에도 역시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무력 뿐만이 아닌 문치의 묘가 중요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에 위화랑의 말은 명언이 아닐 수 없다. “한 사람을 대적하지 않으면 어찌 만인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문노로 하여금 사다함을 호위하게 하였다. 그리고 문노가 500명의 낭도들을 데리고 사다함을 따랐다. 그 후 사다함이 문노로부터 검술을 익혔는지 아닌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곧 가야 정벌에 참전하여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다. 이 때 사다함은 문노에게 같이 출전하자고 했지만, 문노는 가야를 외조의 나라라고 하면서 출전하지 않았다. 문노의 어머니 문화공주는 가야국의 왕녀이다. 야국(왜국)왕이 조공한 왕녀를 법흥왕이 신하인 호조(문노의 할아버지)에게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문노는 가야정벌에 출전하지 않았다. 5백의 낭도를 데리고 풍월주 이화랑의 명으로 부제인 사다함에게로 왔지만 문노는 사다함을 보호하면서 자신의 독자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보면 이 가야정벌이 562년(진흥왕 23년)의 일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사다함의 가야정벌 사실史實이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앞뒤가 잘 맞지 않는 화랑도 설치의 시기를 명쾌히 해결해 준다. 삼국사기에는 576년에 화랑을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 해는 진흥왕이 죽은 년도이다. 진흥왕은 540년에 즉위하였고 그 해 지소태후가 화랑을 설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격검擊劍의 호걸 문노의 휘하에는 걸출한 낭도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김흠운179) 과 승려 동밀은 문노의 격검을 이은 수제자들이다. 179) 김흠운金歆運(? ~ 655년,金欽運으로도 기록한다)은 신라의 군인이었다. 내물왕의 8대손으로, 태종무열왕의 사위이며, 신문왕의 장인이다. 아버지는 잡찬 김달복이다. 어려서는 화랑 문노(8세 풍월주)의 낭도로 지냈다. 655년 백제와의 전투에서 조천성助川城(현재의 충북 영동군의 비봉산성)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삼국사기). 한편 화랑세기에서는 그의 출생에 관하여 자세한 기록이 있다. 신문왕 때의 반역자인 김흠돌金欽突의 동생이며, 어머니는 김유신의 셋째 누이 김정희이다. 부인은 요석공주이며, 두 딸을 두었는데 첫 딸은 문무왕의 장남인 소명태자의 정혼자였으나 혼인 전에 사망하였고, 둘째 딸은 신목왕후(신문왕의 비)로 683년에 계비로 책봉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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