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16. 기숙학교를 통한 인디언 동화정책 (2) |
보스톤코리아 2016-06-27, 11:50:00 |
칼라일 인디언산업학교(Carlisle Indian Industrial School) (계속) 프래트는 인디언학생들을 백인 문화에 흠뻑 젖게 만들어서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다른 부족민들에게 이들이 배운 것을 전파시킴으로써 자연스레 모든 인디언들이 백인사회에 동화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학교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의 경우 심각한 문화적 갈등을 겪었다. 일부 부족민들은 신식교육을 받고 온 젊은 사람들을 향해서 백인으로 변해버렸다고 비난까지 하였다. 칼라일 인디언학교가 근대 인디언 역사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인디언의 허브공항이나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어떤 이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고 유럽과 아프리카를 이어주는 지브롤터(Gibraltar)로 비유했다. 1911년 최초의 전국적인 인디언 모임인 미국인디언협회(The Society of American Indians)도 칼라일학교를 고리로 하여 결성되었다. 이 협회는 50명의 인디언 선각자들로 구성되었는데 많은 회원들이 이 학교에서 배웠거나 가르쳤던 지식인들이었다. 미국정부는 가능한 한 가장 늦게까지 미국에 저항한 부족의 자녀들을 많이 입학시키기를 원했다. 자녀를 학교에 수용하면 인디언의 반란을 예방할 수 있는 볼모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이다. 다라서 수우 족이 제일 먼저 접촉 대상으로 선정됐다. 카스터 장군 부대가 전멸한 리틀 빅혼 강 전투가 있은 지 몇 년 되지 않아 아직도 적대 감정이 많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우려해서 프래트는 내심 망설였지만 정부의 방침에 따라 하는 수 없이 수우 족 마을을 찾아갔다. 먼저 1878년 11월에 로즈버드(Rosebud)인디언보호구역으로 가서 브룰레지파의 점무늬 꼬리(Spotted Tail)를 만나 설득하여 그의 자녀를 칼라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브룰레 추장은 프래트의 논리 정연한 권유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프래트는 “인디언들이 영어를 모르기 때문에 어설픈 통역의 말만 믿고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본의와 달리 불리한 계약이 체결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앞으로 자녀들은 정식 교육을 받아서 백인들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실력을 쌓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믿는다”라고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프래트는 파인릿지 인디언보호구역(Pine Ridge Indian Reservation)으로 가서 오글라라 지파의 추장들로부터도 자녀들을 칼라일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프래트는 인디언으로부터 믿음을 얻기 위하여 추장들이 학교를 직접 방문하여 학교 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붉은 구름(Red Cloud)을 포함하여 40명의 수우 족 어른들이 1880년 6월에 학교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1886년 9월에 제로니모가 투항한 후 수많은 아파치 인디언들은 전쟁포로로 취급되어 플로리다의 감옥에 수감되면서 그들의 자녀들은 칼라일학교로 보내졌다. 인디언 학생들이 학교에 도착하면 우선 인디언식 담요의복을 벗겨 서양식 복장으로 바꾸고 머리카락도 자른 후 이름을 기독교식 으로 다 바꾸어 인디언의 말은 쓰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영어만 쓰도록 하였다. 영어를 빨리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같은 부족출신 학생은 같은 방을 쓰지 못하게 조정했다. 수학기간은 5년이었으며 많은 학생들이 졸업 후에 정부나 산업체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서부에서 유학 온 학생들은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약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항생제가 없던 시절이라 결핵 등으로 많은 학생들이 재학 중에 생명을 잃었다. 이 학교에서는 캐나다 지역 기숙학교에서 만연했던 신체적 성적 학대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칼라일 학교 입학대상은 14세 이상으로서 인디언의 피가 4분의 1 이상이 섞인 인디언으로 제한하였다. 이 학교의 커리큘럼은 영어와 수학 등 일반적인 교과목 외에 상업과 기술 등 산업실무교육도 병행하였으며 체육, 미술, 음악 등의 분야에서도 우수한 교원들을 초빙하여 질 높은 교육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마치 백인들이 하버드나 예일로 진학하고 싶어 하듯이 많은 인디언들이 자녀들을 칼라일로 보내기를 희망하였다. 칼라일 시에는 전통적인 명문 대학인 디킨슨 대학(Dickinson College)이 있었는데 이 대학의 교수진들이 칼라일 인디언 학교를 크게 도왔다고 한다. 이 학교의 미식축구부(‘Carlisle Indians’로 불림)는 최정상급의 실력을 자랑하였다고 하는데, 웨스트포인트와의 경기가 특별히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왜냐 하면 칼라일 학생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인디언 전사로서 또 웨스트포인트 학생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미군 장교로서 1850년대부터 1890년 운디드니 사건까지의 기간 동안 서로 죽이는 치열한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1912년 11월 9일 벌어진 웨스트포인트와의 경기에서 소프 선수와 워너 감독의 활약에 힘입어 칼라일이 27대6으로 이긴 사건은 매우 재미있는 일화로 소개되고 있다. 훗날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가 라인배커(linebacker) 포지션 선수로서 그 경기에서 뛰었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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