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32 |
보스톤코리아 2016-05-30, 11:57:51 |
미진부공편을 마무리하기 전에, 아들만 두었다면 반드시 이름을 '석가'로 지었을 신라의 26대 진평왕, 신라에서는 석가가 태어날 운명이 아니었을까? 그는 딸만 둘(셋 또는 넷) 두었다. 진평왕의 할아버지는 진흥왕(제24대)이다. 아버지 동륜태자가 할아버지 진흥왕의 후궁인 보명궁주의 치맛폭을 찾아서 월담을 하다가 개에게 물려서 죽으면서 차기 왕권은 삼촌인 김사륜(진지왕)에게로 넘어 갔다. 하지만 진지왕은 정사政事는 돌보지 않고 정사情事만 한다는 죄명으로 사도태후와 미실파에 의해 폐위당했다. 왕위는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172) 에게로 가지 않고 요절한 동륜태자의 아들인 김백정에게로 갔다. 이 김백정이 진평왕이다. 진평왕은 딸만 둘(셋, 또는 넷) 두었다. 장녀는 덕만공주로 632년에 선덕여왕으로 즉위하였다. 차녀는 천명공주이다. 천명은 5촌 당숙인 김용춘과 결혼하여 김춘추를 낳았다(삼국사기에 따르면 덕만이 장녀이다. 삼국유사에는 그냥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인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천명공주가 장녀로 나온다. 또한 현대인들의 작품 가운데는 쌍둥이로 그려지기도 한다. 어떻든 누가 장녀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또 한명의 딸 선화공주善花公主(또는 善化)가 등장한다. 이 선화공주는 삼국사기나 화랑세기 등 다른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화랑세기에만 삼녀 천화공주天花公主가 등장한다. 천화공주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하면 삼국사기에는 덕만공주와 천명공주가 나온다. 삼국유사에는 딸들이 등장하는데 선화공주도 있다. 그리고 신라인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에는 천명공주, 덕만공주, 천화공주가 나온다. 여기서는 삼국유사(제2권 기이편)에만 나오는 선화공주를 따라가 본다. '마 캐는 청년' 백제 서동의 '서동요'173) 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의 역사와 신화의 교차점에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남긴 '신라의 선화공주와 백제의 서동' 이야기…, 당시 신라는 백제와 120여 년간 지속되어 왔던 '나제동맹'을 배반하고 한강지역을 차지하였다. 그래서 백제는 554년 관산성(현재 충북 옥천)을 공격하였고 이 전투에서 백제의 제26대 성왕聖王은 무참히 살해되었다. 신라는 성왕의 머리를 베어 관청의 섬돌 밑에 묻어두고 관리들이 오르내리며 밟게하는 모욕을 주었다. 이로 인해 두나라는 불구대천의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성왕이 살해된 후 그의 장남 위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위덕왕이 죽은 후에는 아들인 임성태자와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인 아좌태자가 있었지만(그들은 일본에서 살았다) 다음 왕위는 동생인 혜왕, 그리고 혜왕의 아들 법왕으로 이어져다. 하지만 혜왕과 법왕의 합친 재위기간은 고작 1년6개월 밖에 되질 않는다. 이런 배경속에서 법왕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왕이 바로 무왕이며 그의 아명이 서동이다. 삼국사기에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고 나오지만 또한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중국의 북서 등). 삼국유사의 '서동설화' 속에 나오는 그의 출생배경을 보면 과부의 아들로 나온다. 무왕의 어머니는 못가에 사는 과부였는데 어느날 검은 용이 연못에서 나타나 통정을 한 후 아들이 태어났으니 그가 서동이다(위덕왕의 아들이라는 설을 뒷받침해주는 상징일 수도 있다. 용은 왕의 상징이고, 어느날 위덕왕이 행차를 하다가 못가에 사는 과부의 미모에 빠져 통정을 했을 수도 있다). 무왕 탄생의 설화와 혜왕과 법왕의 지극히 짧은 재위기간과 성왕이 살해된 이후 백제 말기의 불안정한 정국을 고려해보면 적통이 아닌 과부의 아들, 서동이 무왕으로의 즉위는 가능한 사건이다. 무왕은 41년간 재위하면서 백제의 중흥을 꾀했지만 아들인 제31대 의자왕이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부여씨는 막을 내렸다. 172) 김용수라고도 기록되고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동일인으로 화랑세기에는 형제로 나온다. 진흥왕의 손자이며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이다. 어머니가 지도부인이며, 진평왕의 딸인 천명공주와 결혼하여 김춘추를 낳았다(602년). 성골의 신분을 유지하였는지 아니면 아버지 진지왕의 폐위시 족강이 되었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신라의 성골왕은 진덕여왕(진평왕의 동생인 김국반의 딸, 선덕여왕의 사촌)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부인인 천명공주는 생몰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김용춘은 578년생이며 647년에 졸하였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아버지 진평왕의 명으로 왕위를 동생인 덕만공주에게 양보한뒤 출궁하였고, 성골에서 진골로 족강되었다. 그래서 김춘추가 진골이며 삼국사기만으로 풀리지 않았던 '뼈대'의 의문이 풀린다. 18세 풍월주를 지낸 '춘추공편'에서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173) 서동요, 4구체의 향가로 삼국유사에 전하는 향가 14수 중에서 가장 짧다.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署童房乙 夜矣卵乙抱遣去汝(선화공주님은 남몰래 통정해 두고 맛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 양주도 역,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서동 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간다 – 김완진 역)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의견목록 [의견수 : 0] |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 |
|
프리미엄 광고
161 Harvard Avenue, Suite 4D, Allston, MA 02134
Tel. 617-254-4654 | Fax. 617-254-4210 | Email. [email protected]
Copyright(C) 2006-2018 by BostonKorea.com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and Managed by Loopivo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