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11. 리틀 빅혼 강 전투와 카스터 (3) |
보스톤코리아 2016-02-22, 11:42:40 |
시팅불과 크레이지 호스에 의한 카스터 부대의 전멸 (계속) 벤틴은 말발굽 형태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매우 침착하게 전투를 지휘하여 이튿날까지 지속된 인디언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7일 기본과 테리의 연합부대가 전투현장에 도착하여 리노와 벤틴의 부대를 구조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측은 268명이 사망하고 55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인디언 측 피해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 보면 최소 36명에서 최대 136명의 전사자와 약 160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스터가 긴급구원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벤틴이 신속하게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은 데에 대하여 뒤에 논란이 제기되었다. 1868년 11월 27일에 있었던 와시타 강 전투에서 벤틴의 친구인 엘리엇 소령의 부대가 인디언에게 전멸 당할 수도 있는 위기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도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여 때 이른 후퇴를 해버려서 그 부대원이 몰살당했던 일에 대한 앙갚음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일었다. 이에 대해 벤틴은 당시의 상황 하에서는 당장 후퇴해온 리노의 부대와 연합하여 인디언의 공격을 막아내는 게 더 시급했으며, 약간 정신이 멍해진 리노를 대신하여 모든 부대원 전원을 통솔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매우 침착하게 처신하였을 뿐이라고 해명하였다. 미군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수많은 사상자를 낸 패전의 책임자인 카스터의 행동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1876년 9월 2일자 New York Herald 신문에 의하면 ‘카스터의 학살은 정말로 불필요한 부대원들의 희생’이라고 군 출신인 그랜트 대통령이 말했다고 한다. 쉐리든 장군 역시 카스터의 무모한 행동이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그를 비난하였다. 쉐리든은 카스터의 패배 원인으로 몇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째, 테리 장군이 제 2기병대를 추가로 작전에 투입시켜 주겠다고 제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제7기병대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둘째, 대포도 같이 가져가지 않고 군도도 휴대하지 않았다. 대포와 함께 갈 경우에는 행군속도가 느려져 신속한 작전수행에 지장이 많다고 생각하여 카스터는 기병대만으로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셋째 인디언 전사의 수가 훨씬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카스터의 기병대를 세 개의 소부대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미군측은 처음부터 적대적 인디언들의 인원수에 관하여 크게 잘못된 정보에 근거하여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인디언 주재관들(Indian agents)은 미국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고 거주지역 바깥에서 계속생활하고 있는 인디언 숫자는 약 800명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크룩, 기본, 그리고 테리도 이 추정치를 공유하여 군사작전을 짰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거주지역을 빠져나와 적대적 인디언 캠프에 머물고 있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인디언을 빠뜨리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카스터의 부대가 인디언 마을에 가까이 오면서 인디언 정찰병들이 앞서서 인디언 마을을 정탐한 결과 지금까지 봐 왔던 인디언 마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캠프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이를 곧장 카스터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과욕은 필시 화를 불러오기 마련이라 카스터는 이 점을 간과하고 당초의 작전 계획을 밀어붙였다가 큰 패배를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카스터의 행동을 두둔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그러한 지형에서의 전투에는 대포를 운반한다는 것이 큰 짐이 되기 때문에 대포와 함께 가지 않은 것은 실수가 아니며, 리노와 벤틴의 부대로부터 적기에 지원을 받았더라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카스터의 최대 옹호자는 그의 부인 Elizabeth Bacon Custer 여사이었다. 카스터의 참패 이후 그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널리 확산되어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지켜본 카스터의 미망인이 카스터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발 벗고 나섰다. 그녀는 카스터에 관련된 책을 세 권이나 출판하였으며 전국을 돌며 연설을 통하여 카스터의 행동은 정당하였으며 미국을 위해 목숨을 마친 순교자와 같은 참 군인이었음을 역설하고 다녔다.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카스터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지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저술과 강연 등으로 재산도 축적할 수 있게 되어 뉴욕의 비싼 집에서 우아하게 살다가 1933년 4월 4일 91회 생일을 나흘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죽기 몇 년 전에 카스터 성을 가진 자식이 없는 점을 제일 아쉬워한다고 이야기했다. 카스트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시절 앓았던 임질로 인하여 불임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카스터는 나의 영웅 중 한 사람’이라고 쓰여 있는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편지를 보물처럼 간직했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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