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8. 샌드크리크 대학살 (1) |
보스톤코리아 2015-11-16, 12:09:45 |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에 대한 샌드크리크 대학살 미국정부는 서부로 이동하는 이민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1851년 9월 17일 수우족, 샤이엔족, 아라파호족, 크로우족 등 평원인디언들과 라라미조약을 체결하였다. 인디언들이 사냥터로 오랫동안 이용해온 대평원의 땅은 백인들에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다만 백인들이 서부로 가는 통로를 개설하거나 군사 요새를 건설하는 것을 인정하는 수준의 조약이었다. 그런데 1858년 콜로라도 록키산맥에 있는 파이크스 피크(Pikes Peak)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캘리포니아의 골드 러쉬(Gold Rush) 당시에 ‘49ers’라는 말이 생겨났듯이 ‘59ers’라는 말로 불리던 금을 캐러 몰려든 사람들로 인하여 콜로라도에서는 덴버(Denver)와 보울더시티(Boulder City)와 같은 붐타운이 생겨났다. 여태까지 인디언의 땅으로 인정받아온 땅에 백인들이 무단으로 침범하여 금을 캐고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연방정부는 애초부터 이민자들이 인디언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막을 생각이 없었다. 대신 백인들의 무단 점유를 기정사실화할 뿐만 아니라 인디언들로 하여금 콜로라도의 땅 모두를 내놓고 옛 영토의 13분의 1 밖에 되지 않는 좁은 땅으로 몰아넣기 위한 조약을 준비하였다. 1861년 초에 정부 관리들이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와이즈 요새(Fort Wise)로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 추장들을 불러 모았다. 2월 18일 양측 간에 조약이 체결되긴 하였으나 여기서 맺어진 조약에 대하여 서로 전혀 다른 입장에 있었다. 인디언측은 조약체결 당시 상대방에게서 충분한 주거지역과 함께 사냥에 필요한 충분한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으로 들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마흔 명이 넘는 샤이엔족 추장 중 단지 여섯 명만 참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추장들에게 뇌물을 주고 속임수를 써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조약은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미국 측은 조약은 기술된 바대로 아무런 하자가 없으므로 그대로 지켜져야 할 것이며 아직 서명을 하지 않은 추장들도 추후에 서명하면 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포트 와이즈 조약(Treaty of Fort Wise 1861)에 대한 상반된 입장은 앞으로 양측 간의 갈등의 씨앗으로 작용하게 된다. 미네소타에 있던 산티 수우족이 1862년에 미군에 맞서 싸우다 더 큰 낭패를 초래하게 된 일이랑 나바호족이 1864년 봄에 미군에게 당한 이른바 ‘긴 도보여정(Long Walk)’이라고 불리는 강제 이주의 수난을 이미 들어서 아는 터이라 미군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백인들이 많이 다니는 지역에서는 들소사냥을 자제하였다. 1863년에는 샤이엔족의 두 추장, 곧 검은 주전자(Black Kettle)와 살 빠진 곰(Lean Bear)은 워싱턴으로 초청되어 링컨 대통령도 만나고 돌아왔다. 그 자리에서 훈장도 받고 미국국기인 대형 성조기도 받았다. 이 성조기 깃발이 휘날리게 걸어두면 어느 누구도 총을 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그 때 들었다. 1864년에 들어와 양측 간에 몇 차례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충돌의 원인은 모두 미군들이 제공한 사건이었다. 한편 북쪽에 살던 수우족이 이주민과 역마차를 습격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하여 남부의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이 엉뚱하게 미군으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인디언들은 사태가 악화되는 일을 막기 위하여 추장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미군 책임자도 만나고 더 나아가 주지사를 만나 보다 확실한 평화조약을 맺기 위하여 몇 명의 추장들이 덴버까지 갔다. 이 때 검은 주전자는 워싱턴에서 받아온 성조기를 마차에 자랑스럽게 달고 갔다. 처음에 에번스(John Evans) 콜로라도 주지사는 인디언 대표를 만나기를 거절했다. 인디언과 동행했던 윈쿱(Edward Wanshear Wynkoop) 소령이 간청하자 마지못해 주지사는 그들을 만나주었다. 그러나 주지사는 콜로라도 안에 있는 인디언들을 소탕하기로 이미 마음을 먹은 듯 북쪽의 수우족이 한 일에 대해서 생트집을 잡는 등 인디언을 대하는 태도가 불손하고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추장들은 주지사와의 면담으로 화친이 의루어진건지 아닌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오래지 않아 윈쿱 소령은 인디언에 대하여 너무 우호적이라는 이유로 앤소니 소령으로 교체되었다. 한편 인디언에 대한 공격은 시빙턴(John Milton Chivington) 대령이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감리교 목사였으며 남북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공공연히 인디언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다녔으며 샌드크리크 대학살현장으로 떠나기 직전에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인디언을 제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까지 망언을 해댔다. 그가 과연 전직 목사이었는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선한 뜻을 비뚤어진 자기 목적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왜곡시킴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만드는 일이 벌이지고 있다는 것이 서글픈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샌드크리크 학살 이듬해인 1865년에는 그의 아들 토마스가 물에 빠져 죽자 며느리인 사라를 꾀어서 결혼까지 하고 1871년 이혼할 때까지 함께 살기도 하였다. 법률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지 모르나 보통사람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시빙턴 대령의 충복인 앤소니(Scott J. Anthony) 소령은 대학살극의 조연 역할을 너무나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이 참극의 기획은 에번스 주지사, 그리고 주연은 시빙턴으로 볼 수 있다. 앤소니 소령은 요새에 있던 상인들을 인디언 캠프로 보내는 등 인디언들이 안심하고 한 곳에 계속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연극을 꾸미기도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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