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규장각 도서의 수난 |
보스톤코리아 2013-11-04, 15:28:45 |
1962년의 봄 어느날이었다. 창덕궁 장서각의 관리책임자인 황노인이 서울대학도서관으로 나를 찾아왔다. 60이 넘어 보이는 황노인은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장서각의 황”이라고 하면서 “장서각에 보존되어 있던 이조실록이 간데온데 모르게 없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혁명정부의 검찰부에서 그 행방을 조사하고 있는 중인데, 국사편찬 위원회의 신석호 교수님의 말은 “장서각의이조실록은 1.4후퇴시 부산에 소개되었는데 그 후의 일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 는 것이다. 그러면서 백 선생은 1.4후퇴시 규장각도서를 가지고 부산에 갔었으니 그때의 사정을 잘알 것이 아니냐고 했다. 황노인과는 초면이었다. 내가 1.4후퇴 당시 이조실록등 규장각도서를 가지고 부산에 갔던 사람이라는 것을 어디서 듣고 나를 찾아온 것이 분명하였다. 규장각도서의 전래과정을 잘아는 장지태 선생에게 알아 보았더니 황노인은 평양출신으로 한학에 조예가 깊으며 정부수립 후 창덕궁 장서각의 도서를 맡아 관리해 오신 분이라고 하였다. 황노인의 말은 정부가 환도한 후 장서각에 들어가 보니 이조실록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조실록의 분실을 당국에 보고하였던 것같다. 어쨌든 황노인은 말하기를 백선생은 1.4후퇴시 규장각도서를 가지고 부산에 갔었으니 이조실록에대한 것을 잘 알 것이라며 장서각에 같이 가서 이조실록이 없어진 사실을 보라고 했다. 그래서 장서각을 구경할겸 이조실록의 분실사실을 알아보기 위하여 황노인을 따라 창경원 내에 있는 장서각으로 갔다. 장서각은 서양식의 화려한 양옥으로 대청의 넓은 홀에서 열람대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고 한편의 사고에는 고서들이 분류별로 서가에 잘 정돈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조실록이 있었던 실록장은 텅비어 있는 것이다. 장서각의 이조실록은 전라도의무주 적상산사고에 봉인되었던 역대왕의 실록이다. 본래 조선왕조는 국초이래의 태조대왕부터 제13대 명종대왕까지의 역대 왕의 실록을 4부 인출하여 전주사고, 충주사고, 성주사고, 그리고 춘추관에 봉안하여 왔던 것이다. 그런데 선조25년 (1592)의 임진왜란 시 다 소실되고 요행이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난을 피할수 있어서 평안도의 묘향산에 소개하였던 것이다. 난이 평정된 후 선조39년(1606) 전주사고에 봉안되었던 역대왕의 실록을 원본으로다시 3부를 작성, 인출하여 원본은 강화도의 정족산에, 그리고 경북 봉화의 태백산 과강원도의 오대산, 그리고 전라도의 무주 적상산에 새로 사고를 짓고 역대왕의 실록을 각각 봉안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1910년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합방하고 그 역사 정통을 끊어 버리려고 규장각도서를 접수하여 조선총독부에 이관한 다음 각 사고(史庫)를 폐쇄하여 강화도의 적상산 사고에 봉안하였던 이조실록과 충청도의 봉화 태백산 사고에 봉안하였던 이조실록과 기타장서는 규장각도서에 포함시켰다가 후일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강원도의 오대산사고에 봉인하였던 역대왕의 실록과 기타의 장서를 몽땅 일본으로 탈취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전라도의 무주 적상산사고에 봉안하였던 역대왕의실록과 기타장서는 구황실에 돌려주어 창경원내의 장서각에 보존하였던 것이다. 이장서각의 이조실록은 적상산본이라고 하여 오대산본 태백산본과 같은 선조39 (1606)에 인출된 실록으로 매우 귀중하다 그런데 그 실록을 분실하였으니 문제가 조용할 수 없었다. 피난지 부산에 있을 때이다. 1952년 여름의 어느날 마산지방검찰청에서 검사한 분이 도서관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분의 말은 마산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는 한 농부가 이조실록의 책장을 뜯어 사과봉지를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조사하는 중이라고 하면서 기소하는데 더 확실한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답하기를 “이조실록의 원본은 부산에 소개되어 안전하게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 농부가 사과봉지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책은 아마도 일제시대에 편찬 강행한 고종황제의 실록일 것입니다. 그 책이라면 고서책방에서도 흔히 볼 수있는 것으로 귀중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해준 일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장서각의 이조실록이 부산에 소개되었다는 말은 전혀 듣지를 못했다 . 만일 신석호 선생의 증언한 바와같이 장서각의 이조실록이 1.4후퇴시 부산에 소개되었다면 문교당국에서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교부에서도 그 사실을 모르는것 같았다. 구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분이 1.4후퇴시 사세가 급하여 창덕궁의 보물과 함께 장서각의 이조실록을 부산으로 싣고 내려와 부산 용두산 어느곳에 보관하였던 것은 아닌가 하는 말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용두산에 불이 났을 때 다른 물품과 함께 실록이 불타버린 것은 아니었는, 그러나 그같은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위인이 장서각의 이조실록을 비밀리에 일본으로 실어보낸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도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일본은 한일합방이후 조선의 역사를 단절하여 그 정통을 말살하려고 조선 역대왕의 실록을 탈취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일본유출을 의심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장서각의 실록이 부산에 소개되었다는 말은 듣지를 못했다. 만일 그것이 소개되었다면 문교부에 보고되었을 것이다. 도대체 그때는 이조실록의 해외유출에 대한논란은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황노인에게 말하기를 “1.4후퇴시 장서각의 이조실록이 부산에 소개된 사실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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