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2
보스톤코리아  2013-08-26, 12:19:09 
원화(남모와 준정)
진흥왕이 어린 나이(7세 – 삼국사기, 15세 – 삼국유사)에 즉위하여 모후인 지소태후가 섭정을 할 때 화랑의 전신인 원화를 폐지하였다. 그 원인은 원화의 수장인 남모와 준정의 사건 때문이다. 그 사건의 내막을 훑으면서 화랑의 기원을 좀 더 살펴 보기로 한다. 먼저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왕 37년, 576년)를 보면 “37년 봄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일찍이 임금과 신하들이 인물을 알아볼 방법이 없어 걱정하다가, 무리들이 함께 모여 놀게 하고  그 행동을 살펴본 다음에 발탁해 쓰고자 하여 마침내 미녀 두 사람 즉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을 뽑고 무리 300여 명을 모았다.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이 사형에 처해지자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지고 말았다.” 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이어서 “그 후 다시 미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드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라고 한다. 삼국사기를 편찬 할 때 김대문의 화랑세기도 참고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준정이 사형에 처해지자 준정을 따르던 무리들이 스스로 화목을 잃고 원화가 없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에는 지소태후가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들로 하여금 이들을 받들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두 원화 우두머리의 시기질투 살인사건의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면, 남모는 공주이다. 남모공주(南毛公主, ? – 576)는 법흥왕과 보과공주 부여씨의 딸이며 백제 동성왕의 외손녀이다. 그리고 지소태후의 이복 자매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우두머리 준정은 영실공(박영실)을 섬겼는데 그는 지소태후의 두 번째 남편이다. 지소태후는 아버지 법흥왕의 유명을 받들어 영실공을 계부繼夫로 맞아 들였지만 영실공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과 상황에서 300여 명씩의 무리를 거느린 남모와 준정은 서로가 더 많은 무리를 차지하여 우두머리가 되려고 하였다. 남모는 자신이 법흥왕의 딸이라는 신분과 지소태후를 등에 업었고, 준정은 영실공을 섬겨서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준정의 그 노력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으며 지소태후가 준정에게 물러날 것을 종용하면서 낭도들을 남모에게 더 주었다. 이에 시기와 앙심을 품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많은 술을 억지로 먹이고 강물에 던져 죽였다. 그리고 준정은 사형당했다. 그 해가 바로 576년이다. 

이 ‘원화’ 설치와 ‘남모와 준정’의 사건은 576년 봄,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일어난 일인데 역사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원화가 조직되어 운영된 기간이 몇 주 내지는 몇 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이것은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위의 글만 봤을 때이며, 그래서 몇 가지의 의문과 동시에, 화랑의 5대 풍월주인 사다함의 행적을 근거로 화랑의 설치를 진흥왕 초기로 유추해볼 수 있다. 

이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 첫째로 남모와 준정이 죽고 화랑을 설치했다는 576년은 진흥왕이 죽은 해이다. 진흥왕, 김삼맥종은 540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 때가 7세 때 였다면 43세에 죽었고, 삼국유사처럼15세였다면 51세였다. 7세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고로 지소태후가 섭정을 했다. 43세든 51세든 576년이라면 진흥왕이 죽은 해이다. 그러나 진흥왕 재위시, 즉562년(진흥왕 23년)에 대가야 정벌이 있었다. 

이 전투에 사다함이 화랑으로 참전하였다. 이 점을 감안하면 화랑도의 설치는 진흥왕 초기나 대가야 정벌의 이전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둘째로 화랑세기에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했다는 기록을 볼 때,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한 시기는 대체로 551년(진흥왕 12년, 진흥왕이 연호를 551년에 고쳤다)으로 보는데, 즉 지소태후의 생몰년의 기록이 없어서 진흥왕보다 몇 살이나 더 많은지는 잘 모르지만 화랑의 설치는 진흥왕 초기, 지소태후가 섭정을 할 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즉 신라의 황종(거칠부)이 고구려를 정탐하고 와서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본받아 고구려에서 귀화한 혜량법사의 자문을 받아 551년에 화랑을 설치했다는 설이다. 

다음은  진흥왕의 원년인 540년으로 보는 견해이다. 즉, 540년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면서 ‘화랑’이란 이름을 진흥왕의 직전의 왕인 법흥왕이 총애했던 위화랑魏花郞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 위화랑이 화랑의 1세 풍월주가 되었다. 이 540년의 설치설이 역사적인 근거는 희박하지만 여러가지의 사실史實을 종합해 보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즉 신라시대에 쓰여진 화랑세기는 정확한 설치 연도가 없고,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에는 576년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와서 김종서 등이 지은 고려사절요에는 화랑이 540년에 설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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