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미국사의 평행 읽기 (1) |
보스톤코리아 2012-10-31, 12:44:49 |
1517년 10월 31일, 카톨릭 신부이자 학자였던 마틴 루터가 독일 위텐베르크 성당 입구에 그 유명한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고 면죄부 판매를 비롯한 카톨릭 교회의 타락을 성토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의 시작 혹은 오늘날 개신교회들이 10월 마지막주를 종교개혁 주일로 지키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16세기~17세기 유럽에서의 전쟁 혹은 정치, 사회적 격변은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과 결부되어 있다. 실상 종교 개혁은 비-종교적인 의미에서도 역사적인 사건이다.
대개의 역사적 사건이 그러하듯, 종교 개혁 역시 잘 알려진 이야기에 맥락과 파장을 더 해봐야 역사 읽는 재미가 생긴다. 맥락을 알기 위해서 일단 두어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첫째, 16세기 초엽 카톨릭은 왜 “개혁의 대상”이었을까? 둘째, 종교 개혁의 필요성은 루터 단독의 생각이었을까? 마지막으로 그게 대체 미국사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르네상스 교황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서 르네상스 교황 (Renaissance Popes)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해보자. 역사학자들은 보통 니콜라스 5세 (Nicholas V, 재임: 1447~1455년)가 교황으로 취임한 1447년에서 레오 10세 (Leo X, 재임:1513-1521)가 교황직에서 떠나게 된 1521년까지의 교황들을 르네상스 교황이라고 부르고 있다. 르네상스= 문예 부흥=인문주의, 세속화=중세 교회 중심 세계관의 몰락과 인간 중심 세계관의 부상으로 기계적인 암기를 하고 있다면 아마 르네상스 교황이라는 용어 자체가 형용모순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다. 이 공식대로라면 기존 카톨릭 교회의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교황은 르네상스 혹은 르네상스 시대의 ‘문예 부흥’과 적대적 관계에 있어야 할 것이기때문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기 교황청은 르네상스 음악, 미술과 예술가들의 가장 적극적으로 후원자였다. 또 세속화(Secularism)로 치자면, 교황청만큼 세속적인 곳도 드물었다. 교황들은 이탈리아 도시국가 제후들의 물질적 풍요와 사치, 타락을 체현한 또 하나의 제후들로서 카톨릭 교회의 영적 지도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오히려 성직의 “매관 매직”이 널리 퍼져 사실상 성경에 무지한 성직자가 양산되는 일도 다반사였고, 때로는 교황 자신의 사생아를 권력의 요직에 앉히거나 (Nepotism) 세도가/왕가와 정략 결혼 시키는 일도 흔히 발생했다. 성적 타락, 혹은 정치적 권모 술수 역시 르네상스 교황의 문화적 코드였다. 차라리 루터가 핵심적으로 비판했던 면죄부 (indulgence) 정도는 애교였을 지도 모른다. 인문학과 종교 개혁 한편, 카톨릭 교회의 개혁은 (당연히) 루터에 이르러 뚝 떨어진 생각은 아니었다. 카톨릭 교회 내부의 자정노력이 있었고,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인문주의 역시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고 있었다. 루터가 종교 개혁에서 긋게 되는 획은 루터의 비판이 믿음(faith)뿐만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카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행위는 믿음의 산물이며 구원의 열쇠는 믿음에 있다는 신학적 반박을 내놓은 탓이 더 클 수도 있다. 어쨌거나 종교 개혁을 주도하게 된 루터의 자산 목록에는 자신의 신앙적 양심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문헌 지식 혹은 인문학적 소양도 있었다. 루터 이전에 우신예찬 (The Praise of Folly)을 통해 권위주의와 타락의 덫에 빠진 교회 권력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던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 (Desiderius Erasmus)도 마찬가지다. 에라스무스는 라틴어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헬라어 해석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516년 에라스무스는 신약성서의 그리스어판을 출간했는데, 에라스무스의 신약성서는 다양한 판본 성서를 참조했고 꼼꼼한 원문 주석을 곁들였다. 사전의 인문학적 성취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게다. 에라스무스는 그의 그리스어판 신약 서문에 “모든 성서가 전 세계의 여러 말로 번역되고, 시골 농부와 베 짜는 아낙네 그리고 여행객이 성서 읽기로 지루함을 달래길 바랍니다”라고 적었다. 즉, 성서에 접근할 수 있는 라틴어 능력을 무기로 (그나마 르네상스 시기 사실상 문맹에 가까운 성직자도 늘어났지만) 일반인들의 성서 접근을 차단하고 권력을 구축했던 성직자들은 루터보다 사실 에라스무스를 더 두려워해야했을 지도 모르겠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인문학적 권위에 기대고 싶었지만 에라스무스는 종교 전쟁의 와중에 프로테스탄티즘의 편에 서지는 않았다. 구원이 예정된 것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구하겠는가?”라는 입장에서 루터와 신학 논쟁을 펼치기도 했다. 루터 이후 개혁적 신학은 이후 개신교 신학의 몇가지 주요 이론들을 정립한 칼뱅의 신학으로 정립되었으며 칼빈주의는 프랑스의 위그노, 네덜란드, 잉글랜드 등의 종교 개혁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민, 미국사 유럽 각 국가마다 복잡하게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는 하지만, 종교의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 혹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입지를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 그리고 그리고 이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유럽은 크고 작은 종교 전쟁과 사회 변화를 목격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영국에서 영국 국교회가 국교로 자리잡은 덕에 설자리를 잃은 카톨릭 그리고 프로테스탄트들, 프랑스에서 박해당하고 쫓겨나게 된 위그노, 그리고 프랑스의 반-종교개혁으로 성립된 예수회, 칼빈주의를 받아들인 네덜란드의 상인들… 그 모든 유럽의 지각변동과 그로 인한 “이민”은 “미국의 역사” 이전부터 미국땅의 역사를 구성하게 된다. (계속) 칼럼과 관련하여 궁금하신 점은 WisePrep 소피아선생님 (617-600-4777, [email protected])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npr.org/2012/09/04/160578836/transcript-michelle-obamas-convention-speech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email protected] 이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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