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갑오경장 20-1 |
보스톤코리아 2012-10-22, 12:32:55 |
이제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을 마무리 지어야 하겠다.
우선 일본이 대국인 청나라와 전쟁을 하면서까지 조선의 독립과 문명개화를 도우려고 한 이유를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일본의 사학자 사치요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일본은 개항(1854년) 이후, 미.영.러 등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제 2차 이또 히로부미 내각의 외부대신인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가 그 개정에 성공치 못하자, 국회에서 반대파의 불신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이또 내각은 국회를 아예 해산시키고 말았다. 그러자 일반 국민의 정부에 대한 반대가 크게 일어났다. 무쓰 외무대신은 대외긴장을 조성하여 민심을 돌리려고 생각했다. 때마침 조선에서 일어 난 동학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청나라의 군대가 파견됐다. 일본은 이를 호기라고 여기고 군대를 파견하여 청나라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이 기회에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완전 독립시킨 후 자기 세력하에 두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일본을 반대해 온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제 3차 김홍집 내각을 세워 유신개혁을 강행케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제 3차 김홍집 내각은 몰락하고 주도해 왔던 갑오개혁사업은 완전히 끝장이 나고 말았다. 국왕인 고종황제께서는 러시아 공관에 피신하였다. 내각이 외국의 공사관에서 정치를 하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고종황제는 말 그대로 우유부단하여 난국을 극복할 위인이 못 되었던 같다. 정부가 러시아 공관에서 일을 하게 되니 러시아의 정치적 간섭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는 조선정부로 부터 함경북도 경원과 경성의 광산채굴권, 그리고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의 산림 벌채권을 받아냈다. 이는 단순한 개발권이 아니라, 그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정부는 한층 더하여 러시아학교를 설립하여 통역사를 양성하는 한편, 러시아 장교 수십 명을 초빙하여 군사훈련을 담당케 하였다. 이 무렵 미국에 망명하였던 서재필 박사가 돌아 왔다. 그는 1884년의 갑신정변에서 실패하고 미국에 망명, 형설의 공으로 의학박사가 되었고 미국시민의 자격으로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되어 금의환향한 것이다. 1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보니 국모는 왜놈에게 살해되었고, 국왕은 러시아공관에 체류해 계시고, 내각은 러시아 공관의 건물을 빌려 정치를 하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서재필은 정부의 일을 돕기에 앞서 배재학당에서 학생을 가리키는 한편 협성회를 조직하여 민주주의 방법을 지도했다. 그리고 정부의 후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여론을 환기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독립사상을 함양하는 한편, 독립문을 건립하여 독립국가의 기초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시기와 일본의 방해로 문명개화의 성과를 보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도 독립협회의 구국운동으로 대한제국이 탄생하여 새로운 역사시대가 창출되는가 했더니, 이기동, 홍종우 등의 보수반동이 황국협회를 조직하여 미개하고 난폭한 보부상 등을 동원하여 독립협회에 테러를 가하고 종래 강제해체하도록 하였다. 독립협회의 목적과 이상이었던 자주독립과 입헌군국주의 정치제도의 실현은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다. 정부는 러시아에 의탁하는 친노경향으로 기울어져 갔다. 조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러시아는 연해주를 개척하고 그 세력을 만주와 한반도로 확대해 왔다. 1891년 5월 30일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동청철도의 기공식이 울라디보스톡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그리고 청일전쟁 후 청나라로 부터 랴오둥반도(요동반도)를 조차하여 여순과 대련 항을 군항으로 개발하고 하얼빈(하르빈)을 연결하는 남만주 철도를 부설하여 만주경영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00년도 청나라에서 일어난 권비의 난(의화단 운동) 때에는 군대를 대거 만주로 진격시켜 3개월 만에 전 만주를 점령하고 물러가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한국 마산의 끝자락지역인 율구미를 조차하여 해군 군사기지화하고,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에 포대를 설치하여 일본의 침범에 대비하려고 하였다. 러시아가 만주를 점유하고 그 세력을 한반도에 까지 확대하자, 일본 자국의 안보에 중대한 위협으로 보고, 그 대책에 조급하였다. 그러나 혼자의 힘으로 러시아에 대항할 수 없었다. 강력한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1902).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놓고 극한 대립을 했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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