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22. 백제인 간무(桓武) 천황을 받드는 헤이안(平安) 신궁 |
보스톤코리아 2012-01-09, 14:10:19 |
헤이안 신궁(平安神宮)은 명치 천황 28년(1895)에 간무(한무) 천황의 교토(平安) 천도 1,100년을 기념해서 간무 천황을 모신 신궁(神宮)이다.
신사(神寺) 중에서 천황이나 황실 조상신을 제신으로 하는 신사를 특별히 신궁(神宮)이라고 부른다. 뒷날에 명치 천황의 부왕으로 수도 교토의 마지막 왕인 효명(孝明) 천황(1846-1866)도 합사하여 교토 최초, 최후의 천황을 모신 신사가 되었다. 오카자키대로 한복판에 30m가 넘는 주황색 도리이(鳥居)가 우뚝 서있는 곳이 헤이안 신궁이다. 이 궁의 정문은 2층 누각 지붕을 가진 응천문(應天門)인데, 그 너머로 정전인 대극전이 보인다. 이곳은 예전에 국왕이 정무를 보고 신하들의 인사를 받거나 즉위식을 거행하던, 한국의 경복궁 근정전에 해당되는 곳이다. 대극전 앞에는 동쪽에 창룡루(蒼龍褸) 서쪽에 백호루(白虎樓)가 늘어서 있는데 좌청룡, 우백호가 바뀌어 있다. 꽤나 넓은 마당 주위로 건물색깔은 온통 주황색이지만 파란 기와 지붕으로 장식한 누각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저절로 신비로움이 감도는 곳이다. 신궁은 의외로 한산한데 정작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신궁 뒤쪽에 있는 정원이다. 따로 600엔의 입장료를 내야 구경할 수 있는데 돈값을 충분히 보상할만큼 일본 정원의 독특한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교토에서 젊은 아베크족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한다. 2001년 12월 23일, 68회 생일을 맞는 아키히토 일본 천황이 기자회견 도중에 “간무 천황의 생모가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 일본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느낀다.” 라고 발언하자 황거를 관장하는 궁내청 관리들이 당혹해하고 주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 우익들의 엄청난 비난 속에서 일본의 언론들은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유일하게 아사히 신문만 일황의 발언을 보도했을 뿐이다. 아키히토 천황이 정작 말하고 싶었던 진실은 “나는 백제왕의 후손이다.” 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조상 간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완곡하게 말했을 뿐이다. 간무 천황의 부계(父系) 역시 백제 왕족의 피를 받았기 때문이다. 간무 천황 때까지의 일본 왕실을 족보를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의 26대 게이타이 천황은 백제 무령왕의 동생이다. 그 증거가 되는 것이 현재 와카야마현 스다하치만 신사에 일본 국보로 보전되어 있는 인물 화상경 이라는 청동 거울이다. 이 거울은 서기 503년에 백제 25대 무령왕이 만들어 왜국의 동생 오호도 왕자에게 보내준 것인데 오호도 왕자가 나중에 게이 타이 천황이 된다. 인물 화상경 바깥쪽 테두리를 따라가며 48개의 한자로 된 명문이 쓰여져 있는데 그 내용을 풀어서 쓰면 다음과 같다. “계미년(癸未年:서기 503년) 8월 10일 대왕(무령왕) 시대에 오시사카 궁에 있는 오호도 왕자에게 사마(무령왕을 사마왕으로 불렀음)께서 아우의 장수를 바라면서 개중비직과 금주리등 2인을 파견하여 거울을 보내는 바 이 거울은 좋은 구리쇠 200한으로 만들었노라.” 무령왕은 자신의 딸 수백향(手白香)을 게이타이와 결혼시키게 되었고 그 소생이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드린 29대 긴메이(欽明)천황이다. 긴메이 왕의 대를 이은 사람이 일본 왕실 족보 신찬 성씨록에 백제 사람으로 명기 되어있는 30대 비다쓰 천황이고, 비다쓰의 손자가 재위 기간동안 백제궁에 거하고 궁궐 맞은 쪽에 백제 대사를 지었던 34대 서명(舒明) 천황이다. 서명 천황의 아들이 소가씨의 마지막 독재자 소가노 이루카를 참살하고 백제 패망 후에 백제에 부흥군을 파견한 38대 천지(天智) 천황이다. 간무 천황의 아버지 광인(光仁) 천황은 천지 천황의 손자이고 어머니는 무령왕의 후손인 화신립(和新笠) 황태후였다. 이상에서 밝힌 것처럼 간무 천황이 부계, 모계 모두가 백제 왕가의 피를 이어 받은 백제 사람이다. 간무천황이 나라(奈良)의 헤이조교에서 즉위할때는 나라 지방에 불교 사원의 힘이 너무 강해서 천황자신도 운신의 폭이 제한 받게 되었다. 당시 교토 지방에는 백제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지지 계층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기 784년 지금 교토의 남쪽인 나가오카(長岡京)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수도를 이전하고부터 아이누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대신들이 암살당하는 등, 백성들이 불안해하자 10년만에 10리도 되지 않는 가도노군(葛野郡)으로 다시 천도 하였는데, 새로운 수도는 영원히 평안하게 되라는 뜻에서 헤이안(平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바로 지금의 교토를 말한다. 헤이안경으로 천도하는 데는 신라계 도래인 진하승을 비롯한 백제 사람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백제 도래인들을 많이 중용했고 심지어 30여명에 이르는 그의 비빈들 조차 거의가 백제 여인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땅에 먼저 정착해 살고 있던 선주민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백제 편향의 정책만 고수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백제 역사서와 백제인들의 활동했던 기록을 모두 없이 버렸다. 스승의 나라이며 조상의 나라인 백제가 일본인의 머리에 남아 있는 한 일본은 영원히 백제에 예속된 나라로 남아 있게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버린 것은 아니었다. 간무천황 때무터 새로 천도해온 헤이안궁 안에서는 매년 조상신을 모시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첫째가 원, 한신제(園, 韓神祭), 두번째가 신상제(新嘗祭), 세번째가 대상제(大嘗祭) 3가지다. 이 세가지 제사에 대해서는 한일 고대사의 석학이신 홍윤기 교수의 기록을 발췌하였다. 원신은 신라신으로 헤이안궁 남쪽에 있는 원신사(園神社)에 모셨고, 한신(韓神)은 백제신으로 궁의 북쪽 한신사에 모셨다. 원신은 한명인데 한신은 두명으로 2월과 11월에 제사를 드리고 있다. 신상제 (新嘗祭)는 매년 음력 11월 두번째 토끼날에 하늘신, 땅신에게 그해에 수확한 새 곡식을 바치며 감사 드리는 제사다. 명치유신 이후에는 음력을 없애고 양력 11월 23일에 신상제를 지내오고 있다. 대상제는 천황이 즉위한 첫해에 드리는 신상제를 특별히 대상제라고 부른다. 신상제를 황궁에서 지낼 때는 한신 인장무(韓神 人長舞)를 춤추며 백제신을 초혼하는 축문을 읽는데 아래와 같다. “미시마 무명 어깨에 걸치고 나 한신(韓神)은 한(韓)을 모셔 오노라. 한을 모셔 한을 모셔 오노라. 팔엽반(八葉磐)을 손에 쥐어잡고, 나 한신은 한을 모셔 오노라 한을 모셔 한을 모셔 오노라. 아지매, 오개, 오, 오, 오, 오, 오게” (阿知女, 於介, 於, 於, 於, 於, 於介 ) 일본 사람들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한국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여기서 한신은 백제신이며 한(韓)은 한반도의 신(神)이다. 그 한반도의 신을 나중에는 “아지매” 라는 경상도 말로 부르고 있는데 예전에 한반도에서는 단군왕검의 어머니인 웅녀신(熊女神)을 아지매로 호칭했다고 한다. 첫머리에 나오는 미시마는 오오사카의 요도가와 강의 상류 지방으로 일본 고대 역사서 풍토기(風土記)에 기록되기를 닌토쿠(仁德) 천황이 백제로부터 백제신의 신주를 미시마로 모셔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신의 어명(御名)은 오야마쓰 미나미였는데 또다른 이름은 와다시노 오카미(和多志大神)였다. 백제 무령왕의 왕성이 화(和)씨이고 간무천황 생모의 이름이 화신립(和新笠)인데 일본 왕실의 조상신 백제신의 이름이 화다지(和多志)라는 것은 무언가를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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