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14. 백제 문화의 결정판 아스카사(飛鳥寺) |
보스톤코리아 2011-09-19, 15:26:51 |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소아마자도 마지막으로 꼭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었다. 소가씨 집안이 조상 대대로 대신(大臣) 벼슬을 물려 받은 것처럼 가야계 도래인인 물부 집안은 대신 바로 아래 계급인 대련(大連) 벼슬을 물려 받아온 세력가였다. 더구나 물부수옥(物部守屋) 대련은 소아마자의 처남이었다. 무슨 원한이 그리 깊어서 처남 매부가 생사를 걸고 싸워야만 했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물부씨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물부씨의 조상 여지(余旨, 니가, 하야시)는 한반도 가야의 도래인으로 규슈 북동지역에 나라를 세웠다가 야마도로 진출한 집안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조상신을 비롯한 180신을 모시고 살아 왔다. 야마도에서는 천황등극, 제사 등 모든 왕궁 예식을 주관 해오고 있었다. 즉 일본 정통 종교인 신도를 주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아마자, 성덕태자 등 숭불(崇佛) 파에서 조상신을 모시는 신도를 버리고 불교를 믿으라고 하니 반발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국에는 소가씨와 물부씨 간에 전쟁으로 결판이 나서 물부 씨를 제거한 소아마자의 독무대가 시작 되게 된 것이다. 소아마자 대신은 전쟁 중에 발원하기를 만약에 적을 무찌르면 사찰과 사탑을 건립 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 맹세를 실천한 첫 사업이 아스카사(元興寺, 飛鳥寺, 法興寺 )건립이었다. 사탑 건립을 약속은 했지만 당시 왜국에는 절이나 불상을 건축할 장인들이 없었다. 역시 도움을 청할 곳은 백제 왕실뿐이었다. 일본 서기에는 서기 588년에 백제 위덕왕이 혜총(惠總), 영근(令斤), 혜옥(惠昱)을 비롯한 10여 명의 승려들과 사찰 건축가 태량미태(太良未太), 문가고자(文賈古字), 노반 박사 백매순(白昧淳), 기와박사 마나문노(麻奈文奴), 양귀분, 능귀문, 석마제미와 화공 백가(白加)를 보내주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아스카사는 588년에 시작하여 8년 후인 596년에 준공하였는데 5년째 되는 593년, 즉 스이코(推古) 천황 원년에 아스카사 찰주를 세우는 법요 때(탑에 사리를 안치하는 의식) 백관이 모두 백제 옷을 입고 참석하였다고 한다. 본존 불상은 백제계 도래인인 사마지리(司馬止利)가 만든 석가 여래 좌상으로 지금까지 1,400년 넘게 모셔져 있다. 일본 최고의 불상으로 아스카 대불이라고도 불리운다. 독특한 것은 불상의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다. 이것은 한 사람도 빠트리지 않고 모든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성덕 태자가 발원해서 건축한 법륭사(法隆寺)가 장장 20년이 걸렸는데 그 절반도 안되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완공 되었다. 그 이유는 백제 위덕왕이 많은 보탬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백제 위덕왕의 도움을 고맙게 생각한 일본 왕실은 위덕왕 사후에 그를 화엄신장 (華嚴神將)으로 드높이 섬기며 대위덕 명왕이라고 찬양하였다. 일본에서 백제왕에게 명왕 칭호를 부쳐 드높인 임금은 위덕왕과 그의 부왕 성왕(성명왕)뿐이었다. 이곳 Boston의 Museum of Fine Art에 11세기 일본 왕실에서 만든 93cm 높이의 위덕왕 목조 좌상이 보존되어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스카 사의 조영에 종사한 사람들은 모두 백제인 일색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에 불교 문화 유적을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은 주로 백제 사람들이었거나 신라와 고구려 사람들이었다. 일본인 자체의 능력으로는 엄두를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서기 596년 창건 당시에 아스카사는 탑을 중심으로 동, 서, 북 방향에 세 개의 금당을 건립하고 그 바깥 쪽으로 회랑을 두른 가람 배치였다. 소위 고구려식 가람 배치였다. 절의 영역은 동서가 200여 미터, 남북이 300여 미터나 되는 일본 최초의 7당 가람이었다. 아스카사를 건립하고 나서 절의 관리는 소아마자의 아들 젠토쿠 노오미(善德臣)가 맡았고 주지는 백제승 혜총과 고구려승 혜자(惠慈)를 임명하였다. 혜자는 성덕태자의 스승으로 고구려에서 모셔온 고승이었다. 아스카사 건립에는 고구려도 크게 관여해서 황금 300량을 보내 왔다고 한다. 아스카사는 가마쿠라 시대 때 화재를 당해 소실 된 것을 에도시대(江戶時代) 때 현재의 강당을 재건해서 본존 아스카 대불(飛鳥大佛)을 모시고 있다. 바로 사마지리가 만든 석가 여래 좌상이다. 아스카사 옛터를 발굴할 때 찾아낸 일본 최고의 불상이다. 필자가 아스카사에 갔을 때 아스카사 주지가 열을 올려 가며 불상 얘기를 하는데 동행했던 용곡 대학 이상철 교수 부인에게 불상을 누가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었냐고 했더니 없다고 한다. 예전에 절의 대부분이 불에 타버린 이 절에서 내세울 것은 이 불상 하나뿐인데 누가 만들었다는 언급이 일체 없다. 다행히 안내판에 백제 도래인 사마지리가 본존 불상을 만들었다고 적혀 있어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절의 서쪽 문을 나오면 성인 키에 못 미치는 작은 석탑이 서있다. 오륜탑이라고 하는데 소아마자 대신의 손자 소가노 이루카(入廘) 대신의 머리 무덤이라고 한다. 도대체 그가 무슨 큰 죄를 저질러서 이 초라한 탑 밑에 머리만 잘라서 묻혀 있을까? 그 내용이 이렇다. 스이코 천황이 사망-하자 비다쓰 천황의 손자 타무라 (田村) 황자와 성덕 태자의 아들 야마시로(山背) 황자가 천황이 되기 위해 각축을 벌이다가 타무라 황자가 등극하여 조메이(舒明) 천황이 된다. 조메이 천황은 등극하자마자 이미 결혼해서 애까지 달린 보항녀( 寶皇女)를 항후로 맞아 들인다. 소가노 이루카 대신이 중간에 서서 성사시킨 결혼이라고 한다. 역사 학자 문정창 씨는 보황녀가 백제 무왕의 딸이고 의자왕의 누이 동생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조메이 천황이 사망하자, 보황녀가 고오교쿠 천황(皇極天皇)으로 등극한다. 이 때에 성덕태자의 아들 야마시로 황자가 왕위를 물려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제기하자 소가노 이루카는 야마시로 황자 일족을 몰살 시켜 버렸다. 소가노 이루카의 전횡이 극에 달하자 고오교쿠 천황의 아들 나카노오에(中大兄) 황자가 후지와라 가마타리(中臣鎌足) 대신과 힘을 합쳐 소가노 이루카를 참살해 버리고 그의 목을 이 탑 밑에 묻은 것이다. 이로써 100년을 넘게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소가왕조가 끝나고 후지와라 씨가 득세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대화개신(大化改新)이라고 하며, 소가 왕조가 끝이 나는데 백제 아스카 문화는 서기 784년 간무 천황이 지금이 교토로 천도할 때까지 지속된다. 후자와라 가마타리는 역시 도래인으로 셋쓰(攝津, 지금의 오오사카)에서 백제신을 모시고 한적하게 지내다가 졸지에 대신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지난날에 소가씨가 했던 것처럼 자기 딸들을 텐지, 텐무 천황과 고분 천황에게 시집을 보내어 외척으로 권세를 유지하게 된다. 고고규(皇極)천황이 물러나고 고토쿠 천황이 즉위하지만 고고규 천황의 아들 나카노오에(中大兄) 황자 에게 밀려 퇴위하고 고고규(皇極) 천황이 다시 즉위해서 사이메이(齋明) 천황이 된다. 사이메이 천황 때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자 그녀는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을 대장으로 하여 3만여 명의 군사를 파견하지만 백강 전투에서 몰살당하고 그녀도 규수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중대형 황자는 자신의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을 도와 백제 부흥군을 파견하지만 실패하고 후일에 텐지(天智)천황이 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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