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4년 대선과 부정한 거래 (Corrupt Bargain) |
보스톤코리아 2011-09-05, 12:58:49 |
역사는 불가역적이지만 “만약에 …가 아니었다면”이라는 가정은 지금과는 다른 현재를 상상하게해준다. 가령, 2000년 대선에서 부시가 아닌 앨 고어가 당선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21세기 첫 페이지는 9.11 테러,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을 비롯해 미국과 이슬람 세계와의 갈등이 극한을 보여준 시기였다. 고어 행정부에서 딕 체니나 도널드 럼스펠트 같은 매파가 주도하는 군사적 팽창주의가 득세하기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미국-이슬람 세계의 현재가 다소나마 다를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주니어 부시 대통령을 탄생시킨 숨은 공신은 사실 건국의 아버지들이다. 대중들이 주도하는 중우정치 혹은 대중독재 (mobocracy)를 방지하기 위해서 미국은 건국초기부터 선거인단 제도를 통한 간접 선거 그것도 승자독식제도 방식으로 대통령을 뽑아왔다. 효율성때문이라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의’ 판단력 자체를 불신했던 엘리트주의가 더 크게 작용했다. 2000년 대선에서 앨 고어가 총 득표수에서 543,816 표를 더 얻었지만, 선거인단수에서는 271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한 조지 W. 부시가 당선되었다 (당선을 위해 필요한 선거인단수는 270명). 선거인단수 역시 개표 막판까지는 앨 고어가 앞서가고 있었으나, 재검표까지 할 정도로 각축이 치열했던 플로리다주 (선거인단수 25명)에서 부시가 승리했던 탓이다. 고어 지지자들 입장에서는 헌법소원이라도 제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득표수에서 이기고도 당선이 되지 않을 수 있는 미국 대통령 선거 제도에 억울했던 사람은 앨 고어가 처음이 아니다. 1888년 선거에서 그로버 클리블랜드에게 패한 벤저민 해리슨, 1876년 러더포드 헤이예스 에게 패한 사무엘 틸든, 그리고 1824년 존 퀸시 아담스에게 패한 앤드류 잭슨이 그들이다. 이 중 앤드류 잭슨은 유일하게 대권에 재도전 (1828년 선거),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대통령에 당선, 재임 (1832년 선거)까지 성공한 인물이며, 최초로 최다 득표자가 대통령에 당선되지 1824년 선거는 여러모로 기억해볼만한 선거다. 먼저 1824년 선거는 연방파 (Federalists)의 몰락으로 인해, 민주 공화파(Democratic Republicans)들만의 각축으로 치러진 선거다. 건국 초기 중앙 정부를 장악했던 정치 세력은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을 중심으로 북동부 상공업 경제와 강력한 중앙정부을 옹호 했던 연방파였다. 남부 및 서부의 농업 경제 세력을 대변하는 민주공화파는 3대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 (재임: 1801~1808)의 당선과 함께 세력을 확장시켰다. 매디슨과 먼로 대통령 시기를 거치면서 연방파는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연방주의자인 2대 대통령 존 아담스의 아들 존 퀸시 아담스까지도 민주공화파의 일원이 되었을 정도다. 특히 두 차례에 걸친 먼로 대통령 재임 시기는 화합의 시대 (The Era of Good Feeling)라는 애칭이 생길 정도로 건국 초기 정파간 갈등은 소멸해버렸다. 먼로의 뒤를 잇는 1824년 대통령 선거에서 존 퀸시 아담스는 북동부의 대표주자로, 테네시 상원의원이자 1812년 전쟁에서 인디안 토벌로 유명했던 앤드류 잭슨은 거대 플랜테이션 소유주였지만 자수성가한 이력을 내세워 남, 서부 보통 사람들을 대변하는 인물로 출사표를 던진다. 정작 당 중앙이 선택한 후보였던 윌리엄 크로우포드는 병으로 선거 캠페인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또한 서부의 켄터키 출신 하원의장 헨리 클레이는 강한 미국을 만들기 위해 높은 보호관세와 상공업 보호 등의 “아메리칸 시스템”을 어젠다로 들고 나왔다. 그런데 후보가 난립하고 선거 열기가 고조되다보니, 정책보다는 인물에 대한 네거티브 캠페인이 이어졌다. 영국인 아내가 있는 아담스에게는 왕당파, 전쟁영웅 잭슨에게는 살인자, 클레이에게는 노름꾼, 주정뱅이라는 상호 비방과 흑색 선전이 난무하였다. 선거 결과 총득표수에서는 잭슨이 1위 (43%), 아담스가 2위(30%)였다. 하지만 어느 후보도 당선을 위해 충분한 선거인단 표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 결정권은 하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득표수 4위로 이미 당선은 포기해야했던 클레이가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 상황이 된다. 이 때 클레이는 하원에서의 영향력을 동원해 아담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도록 도왔으며, 이후 아담스 행정부의 국무장관이 되었다. 클레이가 아담스를 도운 이유가 잭슨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아담스도 자신의 아메리칸 시스템을 찬성했기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잭슨 지지자들은 이를 두고 부정한 거래 (Corrupt Bargain)라고 주장하였고, 또 한편 (북부 출신 아담스를 도운) 클레이를 서부의 유다라고 맹비난하였다. 말 많은 1824년 선거 덕에 아담스 대통령의 재임기간 정치력은 이미 크게 타격을 입었으니, 1824년 선거 패배가 결과적으로는 잭슨 대통령에게는 상당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은 선거당시 후보 단일화를 위해 사퇴한 박명기 교수 간에도 “부정한 거래”가 있었을까? 돈이 전달된 것은 사실이지만 한쪽에서는 순수하게 선의였다고 주장하고 한쪽에서는 단일화의 댓가였다고 한다. 진위는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다만 후보 난립을 방지한다는 미명하에 돈이나 조직 없이 교육에 대한 비전과 열정만으로는 선거를 치르기 힘든 현재 시스템에서, “만약에” (교육감) 후보에게 공탁금 액수와 선거 비용이 현재와 같이 고비용이 아니었더라도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필자는, “아니다”에 한표 건다.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email protected] 이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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