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7
보스톤코리아  2008-07-21, 19:37:09 
백린(역사학자)


고수(高隋) 5년 전-
수문제의 고구려 정벌의 시도는 비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수문제는 고구려 원정에서 병사를 많이 잃고 또 30만 대군의 출정에 따른 물자의 손실도 엄청났다. 그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저야 하는가이다. 태자 양용(楊勇)은 처음부터 아버지 수문제의 고구려 정벌을 전적으로 반대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태자 양용과 문제의 사이가 벌어지게 되자 태자의 자리를 노리는 형제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수문제에게는 4 아들이 있었다. 첫째는 태자 양용(楊勇)이고, 둘째는 진왕 양광(楊廣)이며, 셋째는 양건(楊健), 그리고 넷째가 고구려 정벌에 나섰던 양량(楊諒)이다. 그 중에 질투와 야심이 두터운 진왕 양광이 향군의 원수에 임명 되면서 형 양용에게 도전하여 태자의 자리를 빼앗고 양용을 살해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양광은 태자의 자리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4년 후인 서기 604년에 병석에 누워있는 아버지 문황제마저 살해하고 스스로 수나라 황제의 옥좌에 올랐다.

이 후로 수양제의 폭정이 시작된다. 그런데 넷째 양량이 태자 양용과 아버지 문황제를 살해한 패도의 반역자 수양제에게 반기를 들고 일으켰다가 숙부 양소(楊素)의 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살해되고 말았다. 이렇게 수양제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다 죽이고 난 다음에도 피가 모자랐던지 의심나는 자는 닥치는대로 죽여버렸다. 이 폭군의 학정에 시달린 민심이 안전할 수가 없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수양제는 민심을 돌리기 위하여 서기 607년에 변경순수에 나섰다가 돌궐의 추장 이계민의 장막에 행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때 고구려의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와 있었다. 돌궐의 추장 이계민은 고루려 사신을 숨겨놓지 못하고 함께 수양제를 만나보게 했다는 것이다.

사극 연개소문에서도 수양제가 이계민의 장막에 행차한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수나라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에 보면 얘기가 약간 다르다. 거기에는 "고창왕(高昌王) 돌궐의 이계민이 고구려 사신과 함께 예궐하여 공물을 바쳤다. 이때 수양제는 고구려 사신을 보고 말하기를 고구려의 영양왕이 입조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영양왕은 두려워 해서 입조치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사신이 돌궐의 추장 이계민을 앞세워 가지고 새로 황제가 된 수양제를 찾아본 것은, 앞서 수문제가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참패를 당한 일로 양국 관계가 탐탁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계민을 앞세운 것은 수문제가 서기 598년에 의성공주(義成公主)를 돌궐의 추장 이계민에게 출가시켰기 때문에, 말하자면 수양제와 이계민은 처남 매부 간이라고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략 결혼이었다. 그리고 의성공주가 참말로 황제의 딸이었는지 아니면 궁녀를 공주로 꾸며서 시집을 보냈던 것인지 알지 못한다. 어쨌든 수나라가 두려워 했던 것은 서북방면의 돌궐과 동북쪽의 고구려였다. 수양제는 이 두 나라의 동향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일 두 나라가 손을 잡고 수 나라를 공격해 온다면 패망은 불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수양제는 고구려의 영양왕을 입조하라고 한 것이다.

일본의 역사학자 니시무라 데이지(西村貞二)는 그의 저서『세계사』에서 말하기를 "중국의 역사는 한민족과 서북의 유목 민족과의 항쟁사"라고 했다. 진한 이래로 서북의 유목 민족들이 몽고의 초원을 따라 동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장성을 넘어 침입하는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 중국의 안전에 큰 환란이 되었던 것이다. 전한의 고조 유방은 북방의 흉노를 정벌하려고 나섰다가 도로 흉노에게 포위되어 성하지맹(城下之盟)의 항복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흉노왕의 애첩에게 많은 금품을 뇌물로 주고 간신히 풀려 나오는 대국의 체면상 있을 수 없는 수모를 당했다. 역사는 이를 평성지치(平城之恥)라고 한다. 북방 유목민족들은 간헐적으로 침입하여 오기 때문에 그 방비가 쉽지 않았다. 중국은 북적의 흉노와 돌궐 그리고 서융의 토반에 대하여는 결혼 정책을 택했고, 동쪽의 고구려에 대하여는 책봉정책으로 관계를 맺어 왔다.

전한의 선제(宣帝)는 원봉 1년(BC 57년)에 궁녀 왕소군(王昭君)을 흉노왕 호한사 선우(呼韓邪 禪于)에게 시집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정략결혼의 선례이다. 왕소군은 모진 운명을 비탄하며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 비참한 사건은 한 왕조가 흉노에게 계속 시달려 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희생된 한 여인의 비극을 말해주는 전설적인 일화이다. 옛날 성북(城北)의 초원에 명비묘(明妃廟)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왕소군의 화상을 모셔 놓고 정치적인 제물로 희생된 왕소군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워진 사당이었다는 것이다.(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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